고려 말 형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두문동 72현으로 절의를 지킨 채미헌공파의 파조, 호는 채미헌
| 생몰 | 1334 ~ 1425 |
| 시대 | 고려 말~조선 초 |
| 본관 | 정선 전씨 |
전오륜(全五倫, 1334~1425)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정선, 자는 중지(仲至), 호는 채미헌(採薇軒)입니다. 대제학 전분(全賁)의 아들이고 문하시랑평장사 전우화(全遇和)의 손자라고 전합니다(일부 자료는 아버지를 평간공 전빈으로 적습니다). 정선 전씨 채미헌공파의 파조입니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합천지군사·진주목사·경상도안렴사 등 외직을 거쳤고, 1391년(공양왕 3) 우상시·좌산기상시·형조판서를 차례로 지냈습니다. 대제학까지 올랐다고 하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색·정몽주와 사귀며 함께 조정의 잘못을 탄핵하고 상소했다고 합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357년 국자감 생원, 1358년 음직으로 봉선고판관, 1360년 문과 급제 후 합천지군사·진주목사를 지냈고, 1369년 삼남의 흉년과 왜구 대응을 위해 경상도안렴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급제 연도는 나무위키가 1373년으로 적는 등 자료마다 다릅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개성 광덕산 기슭 두문동에 들어갔고, 태조가 조선에 협조하라고 회유했으나 따르지 않아 본향 정선으로 본향안치되었다고 합니다. 풀려난 뒤 정선 서운산에 은거했습니다. 호 채미헌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를 캐 먹다 죽은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땄고, 그는 움막에 살며 패랭이를 쓰고 다녔으며 삭망마다 조복을 입고 산에 올라 송도를 향해 통곡했다고 전합니다.
정선군 남면 낙동리의 거칠현동은 전오륜을 비롯해 김충한·고천우·이수생·신안·변귀수·김위 등 칠현이 은거했다는 골짜기입니다. 마을에는 칠현사가 있고, 1985년 6월 정선 조양회가 세운 칠현비와 칠현의 시를 새긴 고려유신비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고사리를 캐던 산은 백이산으로 불립니다.
정선 전씨 종친회는 정선아리랑의 노랫말("만수산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을 전오륜이 지었다고 소개합니다. 학계에서는 구비문학이라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 없다고 보며, 칠현이 망국의 한을 읊은 정서가 아리랑에 이어졌다는 전승이 정선 지역에서 유력하게 전해지는 정도입니다. 정선아리랑은 1971년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운산에 은거한 지 30여 년 뒤인 1425년(세종 7) 합천지군사를 지낸 아들 전맹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맹겸의 후손이 거창 영승리 등에 터를 잡으면서 채미헌공파가 경남 거창과 강원 정선에 큰 세거지를 이루었습니다.
처음 합천군 봉산면 원촌리에 묻혔다가 합천댐 건설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이장 시기는 위키백과가 1986년, 강원도민일보가 1994년으로 달리 전하며, 현재는 정선군 남면 낙동리 서운산 문중 묘역에 모셔졌다고 합니다. 경남 안의의 서산서원에 제향되었다고 전합니다.
장남 전맹겸(全孟謙)은 합천(강양) 군수를 지내고 거창 마리면 영승리에 입향했고, 오늘날 채미헌공파 후손 대부분이 그 후손입니다. 차남은 전숙겸이며, 손자 전효우는 조선 문과에 급제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