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과 함께 거병한 의병장,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 호는 돈헌

| 생몰 | 1851 ~ 1916 |
| 시대 | 구한말·일제강점기 |
| 본관 | 평택 임씨 |
임병찬(1851~1916)은 구한말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평택, 호는 돈헌입니다.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했고, 1883년 호남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재산을 내어 굶주린 이웃을 구휼해 지역 유림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낙안군수를 지냈으나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어 고향 회문산 인근에서 제자를 길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척화파 유림의 의병 움직임이 높아졌고, 면암 최익현이 호남으로 내려와 정읍에서 거병을 준비할 때 합류했습니다. 1906년 6월 4일 정읍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의병은 인근 고을을 차례로 점령했으나 순창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패했고, 최익현과 임병찬 등 지도부는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에 갇혔습니다. 고령의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별세했고 임병찬은 1907년 풀려났습니다.
1910년 국권이 넘어간 뒤 고종의 밀지를 받아 독립의군부를 이끌었습니다. 1912년과 1913년 거듭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한다는 밀지를 받아들였고, 전국 조직을 결성해 1914년 5월 독립 선언을 계획했으나 지도부가 연이어 체포되어 조직이 무너졌습니다. 임병찬도 붙잡혀 거문도에 유배된 뒤 단식으로 순국했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임병찬은 스승격인 최익현과 함께 1906년 6월 정읍 무성서원에서 거병했습니다. 의병은 태인·정읍 일대 여러 고을을 차례로 점령했으나 순창에서 관군과 맞서 싸우다 흩어졌습니다. 최익현을 비롯한 지도부가 붙잡혀 대마도로 보내졌다는 점이 이 거병의 결말입니다.
1910년 이후 고종의 밀지에 따라 의병 항쟁을 이어 가려는 조직이 독립의군부입니다. 임병찬은 서울을 오가며 전국 조직을 짜고 1914년 5월 거사일을 정했으나, 조직원 한 사람이 일본 경찰에 잡히면서 연쇄 검거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거문도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유배지에서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아들 임응철·손자 임수명·동생 임병대도 각각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읍시에는 창의 유적지가 정비되어 있습니다.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정읍시가 임병찬 창의 유적지를 정비해 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들 임응철, 손자 임수명, 동생 임병대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해 서훈을 받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