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수 林亨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문신, 자는 사수·호는 금호,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돼 사사

제주목 관아 전경(임형수가 목사로 좌천된 제주목의 관아) — 인물 사진이 아닌 유적 사진
제주목 관아 전경(임형수가 목사로 좌천된 제주목의 관아) — 인물 사진이 아닌 유적 사진 · 공공누리 제1유형(출처표시) — Wikimedia Commons
생몰1514 ~ 1547
시대조선 중기
본관평택 임씨

생애 약력

임형수(1514~1547)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택, 자는 사수, 호는 금호입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강직했다고 전하며, 1535년(중종 30)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의 주서·사서·설서·수찬 등을 거쳤습니다. 1541년에는 호당에서 사가독서하는 영예를 얻었다고 합니다.

벼슬길은 사헌부와 홍문관을 오가며 이어졌고, 함경도 회령판관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습니다. 평택 임씨 충정공계에 속하며, 위키백과는 임견미의 형인 임성미의 6세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다른 자료는 임언수의 7대손이라 하여 표기가 다릅니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되어 초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윤임 일파로 몰려 압송되었고, 윤원형에 의해 사사되었습니다. 선조 때 신원되고 정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고 전합니다.

을사사화와 제주

1545년 을사사화 이후 임형수는 윤원형 세력의 미움을 사 제주목사로 좌천되었습니다. 곧 파직되어 초야로 돌아갔으니, 홍문관에서 쌓은 경력이 사화의 소용돌이에서 끊긴 셈입니다.

양재역 벽서 사건

1547년 양재역에 붙은 벽서를 계기로 정미사화가 일어났습니다. 임형수는 윤임의 일파로 몰려 절도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고 합니다. 이 벽서가 윤원형의 지시로 붙었다는 설명도 있어, 사건의 성격은 자료마다 평가가 갈립니다.

신원

억울한 죽음은 시간이 흐른 뒤 선조 때 신원되었고, 정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고 전합니다. 이 후대 추증 기록은 나무위키 등 2차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므로 원전 확인이 필요합니다.

묘소

묘소의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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