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전후 활약한 친명배청 무장, 자는 영백·호는 고송, 시호 충민

| 생몰 | 1594 ~ 1646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평택 임씨 |
임경업(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평택, 자는 영백, 호는 고송, 시호는 충민입니다. 충청도 충주 달천촌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평안도 개천에서 났다는 기록도 함께 전합니다. 아버지는 절충장군에 오른 임황, 어머니는 파평 윤씨입니다. 평택 임씨 전객령공계에 속하며, 고려 말 형조판서를 지낸 임정의 7대손으로 소개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자료에 따라 세대 수 표기는 다릅니다).
어릴 때부터 기상이 활달해 전쟁놀이를 즐겼고,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1618년 아우 임사업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다고 합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자원해 안현 싸움에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습니다. 이후 평양중군으로 검산성·용골성을 수축하고,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쌓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습니다.
병자호란(1636)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주부윤으로 백마산성에서 청군의 진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청군이 산성을 피해 서울로 내려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뒤에 청의 요구로 명나라 군과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되자 명과 몰래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1643년 명으로 망명했다가 청에 붙잡혀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1646년 조선으로 송환되어 심문을 받던 중 별세했습니다.
1630년대 임경업은 평안도 일대에서 산성과 읍성을 고치며 방비를 맡았습니다. 1633년에는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고, 명나라에 반기를 든 공유덕 무리를 토벌해 명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634년에는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으로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했다고 합니다.
1637년 가도 정벌 때 청의 요구로 명군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명에 사람을 보내 본심이 아님을 알리고 피해를 줄였다고 전합니다. 이후 청에 이 사실이 알려져 압송되던 길에 황해도 금교역에서 탈출했고, 1643년 명으로 건너가 부총병 직을 받았으나 곧 명이 무너지면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1646년 조선으로 돌아와 김자점 등의 심문을 받던 중 별세했고, 6년 뒤 김자점이 역모로 처형되었습니다.
1697년(숙종 23) 복관되었고, 1791년 정조는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기게 했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입니다. 부인 완산 이씨는 청에서 심문을 받다 자결했다고 전하며 충렬사 경내에 정렬비가 있습니다. 한편 민간에서는 억울한 죽음을 기려 그를 장군신으로 모시는 믿음이 이어졌고, 『임경업전』이 널리 읽혔으며, 연평도 조기잡이의 '살' 이야기 등 전승이 각지에 남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설화는 사실과 구분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충주에 묘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충주 충렬사(忠烈祠)와 평북 선천의 충민사 등에 모셔졌다고 합니다. 1726년 호서 지방 유림이 충렬사를 세우고 이듬해 사액을 받았으며, 1978년 성역화되었다고 전합니다.
평택 임씨 전객령공계로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