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때 영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문신, 호는 금릉·사영, 시호 문헌, 문집 『금릉집』
| 생몰 | 1760 ~ 1840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의령 남씨 |
남공철(1760~1840)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원평, 호는 사영·금릉, 시호는 문헌입니다. 179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 여러 판서직, 대제학 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순조 시대 정계의 핵심 인물로, '천생오태사(天生五太史)'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고 소개됩니다.
1807년 동지사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기록인 『일기』에 중국 인사들과의 교유와 필담이 남아 있습니다. 연행 중 받은 서문들은 1815년 그가 직접 편찬해 간행한 문집 『금릉집』에 실렸고, 서화를 매개로 사람들과 교유하며 감상·비평한 『서화발미』도 남겼습니다.
1818년 우의정으로서 올린 상소로 억울하게 처형된 남이 장군의 관작이 회복되었다고 전합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능안골 청계산 자락의 금릉 남공철 묘역으로, 2002년 성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문인석 없이 옛 형식을 간직해 조선 후기 사대부 묘제 연구에 가치가 있다고 설명됩니다. 서울 종로구 자하동(현 청운동)이 이 집안의 세거지였다고 전해집니다.
1792년 급제 후 대사성·도승지·판서·대제학 등 요직을 두루 지냈습니다. 순조 때 정승의 자리에 올라 영의정에 이르렀습니다.
1807년 청나라에 다녀온 기록을 『일기』로 남겼고, 1815년 직접 편찬한 『금릉집』을 간행했습니다. 제1책은 일실되고 제2·3책이 전한다고 소개됩니다.
1818년 남이 장군의 관작이 회복된 것은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 덕분이라고 소개됩니다. 같은 집안의 억울한 옥사를 바로잡은 일로 기억됩니다.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능안골 청계산 자락의 금릉 남공철 묘역이며, 2002년 성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고 소개됩니다.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의령 남씨 문신입니다.
『금릉집』이며 1815년에 직접 편찬해 간행했습니다.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능안골의 금릉 남공철 묘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