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의 난과 여진 정벌에서 공을 세운 병조판서, 유자광의 모함으로 처형된 장군, 시호 충무

| 생몰 | 1441 ~ 1468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의령 남씨 |
남이(南怡)는 조선 전기의 무관이자 척신으로 본관은 의령, 시호는 충무입니다. 출생은 1441년 또는 1443년으로 자료가 갈리며, 1468년 10월(음력 27일)에 25세 안팎으로 처형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태종의 부마 의산군 남휘이고 할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이며, 아버지는 남빈, 장인은 좌의정 권람입니다. 영의정 남재의 현손이기도 합니다.
1460년 무과에 급제하고 1466년 발영시에 합격했으며, 1467년 이시애의 난 토벌에 선봉으로 참여해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이어 건주여진 정벌에 나가 이만주 부자를 참살해 2등 군공을 받았고, 세조 말에는 병조판서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신숙주 등의 비판으로 해임되어 겸사복장으로 옮겨졌습니다.
같은 난에서 공을 세운 유자광은 세조의 총애를 받는 남이를 시기했고, 남이가 혜성을 보고 한 말을 엿들어 역모라 모함했다고 합니다. 남이는 하옥되어 1468년 강순 등과 함께 효수되었고 연좌된 모친도 처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으나 이후 야사, 특히 『연려실기술』은 유자광이 날조한 옥사로 기록했습니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관작이 회복되었습니다.
의산군 남휘와 정선공주의 손자로 왕실의 외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장인 권람은 좌의정이었고 첫 부인 안동 권씨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1460년 무과에 급제했다고 하나 출생 연도에 두 설이 있어 급제 때의 나이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에서 선봉으로 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이 되었고, 건주여진 정벌에서는 이만주 부자를 참살했다고 기록됩니다. 이 공으로 세조 말 병조판서에 올랐습니다.
예종 즉위 직후 한명회·신숙주의 견제로 물러난 뒤 유자광의 고변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사건을 두고 실제 역모였다는 인식에서 날조된 옥사라는 인식으로 바뀌어 갔고, 1818년 남공철의 상소로 관작이 회복되었습니다.
창녕 구봉서원과 서울의 사당 등에 배향되었고, 해마다 남이 장군 사당제가 열린다고 소개됩니다. 일정은 해마다 다를 수 있으니 확인이 필요합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습니다. 강원도 춘천 남이섬의 묘는 전설과 관련된 것으로, 실제 안장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소개됩니다.
의령 남씨입니다. 같은 성의 영양·고성 남씨와는 구별됩니다.
1441년과 1443년설이 있어 자료마다 다릅니다.
1818년 순조 때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관작이 회복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