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에 참전하고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부원수, 이순신의 벗, 호는 친친재
| 생몰 | 1545 ~ 1598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보성 선씨 |
선거이(1545~1598)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보성, 자는 사신(思愼)·이중(怡仲), 호는 친친재(親親齋)입니다. 선형의 증손이며 시조 선윤지의 8세손으로 소개됩니다. 출생연도는 1545년과 1550년으로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1569년 공신 후손으로 겸사복에 임명되었고 1579년 식년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1586년 함북병마절도사 이일의 군관이 되었고, 1587년 녹둔도 사건으로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병조판서 정언신에게 무고함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고 전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진도군수로서 이순신과 한산도 대첩에 참전했다고 하며, 그해 11월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독산성에서 싸웠습니다. 1593년 2월에는 부원수 겸 전라도병마절도사로 권율과 함께 행주대첩에 참전했습니다. 1594~95년 충청수사를 지냈고, 1595년 황해병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깊어 부임하지 못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병든 몸으로 울산성 전투에 참전해 왜군 70여 명을 베었으나 1598년 1월 총탄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시신을 찾지 못해 고향 보성 조성면 봉능리에서 초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그의 공을 선무공신 1등으로 올려야 한다는 후손 쪽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선거이와 이순신은 함경도 근무 때부터 가까웠다고 합니다. 『난중일기』에는 충청수사였던 선거이가 풍습병을 앓자 이순신이 자주 문병했고, 1595년 9월 그가 떠날 때 이별의 시를 써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의 첫머리는 북쪽에서도 함께 고생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같이했다는 내용입니다.
1593년 행주대첩에서 권율과 함께 전라도 군사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후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명을 두고 병력 보존을 주장하며 후퇴시켰는데, 이 일이 뒷날 명령 불복으로 문제되어 선무공신 1등에 오르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 설명은 후손 쪽 서술이 많아 사실 판단은 신중해야 하며, 실제 서훈은 선무원종공신 1등입니다. 1801년 충신 정려가 내려졌고 1862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고 합니다.
1598년 1월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했고, 정조 때 『일성록』 1799년 기록에도 그의 전공이 언급된다고 합니다. 광주 광산구에 충신정려문이 있고, 고양 행주서원에서는 권율의 부원수로 함께 제향된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에는 1592년 3월 전라도병마절도사 임명장이 소장되어 있다고 소개됩니다.
시신을 찾지 못해 고향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에서 초혼장을 치렀다고 합니다(국방일보 기사는 보성 선영의 청룡동에 장사했다고 전합니다).
13세손으로 육군참모차장과 전쟁기념관장을 지낸 선영제, 14세손으로 야구 선수 선동열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