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주산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친 고려의 무장(본관은 자료에 따라 진천 송씨 전승과 의성설이 갈림)
| 시대 | 고려 후기 |
| 본관 | 진천 송씨 |
송문주(宋文胄, 생몰년 미상)는 고려 후기의 무장으로, 몽골의 침입 때 귀주성 전투에 참전하고 죽주산성을 지켜 낸 인물입니다. 그의 본관에 관해서는 자료가 갈립니다. 진천 송씨 종중은 족보에 자를 '문주'라고 전하는 송언기의 아우 송언상(宋彦祥)이 곧 송문주라고 전하며, 용인시민신문도 같은 설명을 소개합니다. 반면 2017년 4월 안성시 학예사가 공개한 1891년 간행 『죽산부읍지』의 성곽 조에는 '장군의 이름은 문주이며 의성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의성 송씨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진천 송씨 대종회가 공식 입장을 내지는 않았지만 2018년에도 충의사 제향에 참석했습니다. 이 글은 두 설을 함께 적고, 본관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송문주는 1231년(고종 18) 몽골의 1차 침입 때 박서(朴犀) 휘하에서 귀주성 전투에 참전했고, 그 공으로 낭장이 되었습니다. 1236년 몽골의 3차 침입으로 각 도의 산성을 지킬 방호별감이 파견될 때 죽주(지금의 안성 죽산)에 파견되어 죽주산성을 지켰습니다. 몽골군은 처음에 항복을 권유했으나 성안에서 병사들을 내보내 쫓아냈고, 이어 공성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귀주성에서 몽골의 공성 전술을 체험한 송문주는 '오늘은 적이 어떤 기계를 설치할 것이니 우리는 어떤 기구로 맞서야 한다'며 대응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몽골군이 화포로 성문을 부수자 성안에서도 포를 써서 물러나게 했고, 인유·관솔불·쑥풀 등으로 불을 지르자 때맞춰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해 많은 적을 베었습니다. 결국 보름 만에 몽골군은 공성 무기를 불태우고 물러갔습니다. 군사들은 그의 말이 적의 전법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를 '신명(神明)'이라 불렀고, 조정은 그를 좌우위장군으로 삼았습니다.
죽주산성 안에는 그를 기리는 충의사가 있으며, 채제공이 쓴 『송장군묘비명』에는 죽산부사 유언지가 퇴락한 사당을 수리했다고 나옵니다. 붕어를 잡아 몽골 진영에 보내 성에 물이 많음을 알렸다는 전승도 전합니다. 매년 음력 9월 9일 안성시가 제향을 지내고, 2017년 8월 8일에는 죽산면 삼거리에서 동상 제막식이 열렸으며 진천 송씨 대종회는 감사패를 전달했습니다. 가계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이 글은 송언기와 형제라는 설명을 확정 사실로 쓰지 않습니다.
진천 송씨 족보는 송언기의 아우 송언상의 자가 문주라고 전합니다. 이는 이름이 달리 적힌 같은 인물이라는 설명입니다. 반면 1891년 『죽산부읍지』는 의성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어느 쪽도 이번 조사에서 교차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본관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1236년 죽주산성에서 몽골군의 공성을 물리친 고려의 방호별감입니다.
진천 송씨 종중 전승과 1891년 죽산부읍지의 의성설이 갈려 확정하지 않습니다.
죽주산성 안의 충의사이며 매년 음력 9월 9일에 제향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