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하다 옥에서 숨진 문신, 충효 정려의 주인공(시호 의민)
| 생몰 | 1663 ~ 1693 |
| 시대 | 조선 후기 숙종 때 |
| 본관 | 곡산 연씨 |
연최적(延最績, 1663~1693)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곡산,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癡堂)입니다. 청주 출신으로 첨지중추부사 연택로의 아들이며, 곡산 연씨 22세손으로 소개됩니다. 우암 송시열과 수암 권상하에게 배웠고, 1682년(숙종 8) 증광시 병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을 지냈습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밀려날 때 파직되었습니다.
1693년(숙종 19) 그는 인현왕후를 폐위한 일이 부당하다는 점과, 이 일로 화를 입은 서인들을 용서해 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여섯 조목으로 올렸습니다. 숙종의 노여움을 산 그는 일곱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끝내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31세 안팎이라고 전합니다. 자료에 따라 나무위키는 '형장에서 옥사'라고 쓰고 청주시 자료는 '옥에서 죽었다'고 적어 표현이 다르지만, 상소로 인한 고문 끝의 옥사라는 줄거리는 같습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이듬해인 1695년에 신원되어 도승지로 추증되고 충신 정려가 내려졌습니다. 순무사가 그의 효행을 조정에 아뢰어 효자 정려까지 더해졌습니다. 1747년(영조 23)에는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 '의민(毅愍)'이 내려졌으며, 이듬해 정려를 다시 짓고 '충효양전문(忠孝兩全門)'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이 정려문은 청주시 흥덕구 모충동 47-10에 있는 청주시 향토유형유산이며, 소유자는 곡산연씨 종중입니다.
그의 위패는 청주 가덕면 검암서원에 모셔져 있다고 하고, 저서로 《치당유고(癡堂遺稿)》가 전합니다. 1990년에는 후손이 '忠信毅愍公延最績直疏碑'를 정려 앞에 세우고 건물을 중수했습니다. 곡산 연씨 문중을 설명하는 일부 자료는 그가 생전에 도승지까지 오른 것처럼 적지만, 청주시와 청주문화대전은 도승지를 사후 추증으로 설명하므로 이 문서는 후자를 따랐습니다.
청주 모충동의 충효양전문은 마을에서 '효자문'으로도 불립니다. 연최적의 급제 시기와 옥사 표현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급제는 1682년(숙종 8)이라는 자료가 있고 청주시 자료는 연도 없이 증광문과 병과라고만 적습니다. 곡산 연씨 전체 이야기는 곡산 연씨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청주시 흥덕구 모충동 47-10에 충효양전문(정려문)이 있다.
후손이 곡산연씨 종중으로 정려문을 관리하며, 1990년 직소비를 세웠습니다.
곡산(谷山)입니다. 정려문 소유자도 곡산연씨 종중입니다.
1693년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과 화를 입은 서인의 용서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