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당 延薇堂

엄항섭의 아내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도운 여성 독립운동가,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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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1908 ~ 1981
시대일제강점기~현대
본관곡산 연씨

생애 약력

연미당(延薇堂, 1908~1981)은 일제강점기의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본명은 연충효(延忠孝)이고, 1936년 장사로 옮긴 뒤 아명 '미당'을 쓰기 시작해 이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에서 연병환의 맏딸로 태어났고, 조부는 연채익입니다. 아버지가 1919년 3·13 만세운동 지원으로 체포된 뒤 가족은 상하이로 옮겼으며, 그는 상하이 인성학교와 진강여자중학교에 다녔습니다. 1926년 아버지가 진강에서 별세한 뒤 상하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1927년 3월 20일 프랑스 조계 공무국 공무원이자 독립운동가인 엄항섭과 혼인했습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결혼식에는 이동녕·김구·안창호·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이 참석했습니다. 1928년 딸 엄기선을 낳았고, 엄기선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해 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1930년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해 임시위원을 맡았고, 1931년에는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에 여성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했으며, 국치일마다 전단을 돌려 민족의식을 일깨웠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 때에는 윤봉길이 지닌 도시락 폭탄의 보자기를 만들었다고 전하며, 의거 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자싱으로 피신했습니다. 임시정부 이동 때는 요인들을 수행했고, 장사에서 열린 3당 통일회의 때 저격당한 김구를 간호했습니다. 1936년부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해 선전·위문 활동을 했습니다. 1940년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구성하고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일본군 소속 한인 사병이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도록 권유하는 초모공작과 포로 위문에도 나섰습니다.

1946년 7월 광복군 7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귀국했습니다. 광복 뒤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에 힘썼으나, 6·25 때 남편이 납북되고 월북했다는 오해와 경제적 어려움, 중풍으로 오래 고생하다 1981년 1월 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훈은 나무위키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적혀 있으며, 2018년 7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서훈과 이야기 차이

연미당의 서훈은 자료에 따라 서술이 다릅니다. 나무위키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적고, 위키백과는 2018년 7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적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정확한 서훈 기록은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서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아버지는 연병환, 삼촌은 연병호입니다.

묘소

자세한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후손

딸 엄기선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해 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연미당 자주 묻는 질문

연미당은 어떤 일을 했나요?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과 한국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도운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연미당의 남편은 누구인가요?

독립운동가 엄항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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