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강원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13도창의대진소 대대장

| 생몰 | 1911 |
| 시대 | 대한제국~일제강점기 |
| 본관 | 곡산 연씨 |
연기우(延基羽)는 대한제국 말기에 경기·강원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입니다. 나무위키는 『곡산연씨대동보』(2002)를 근거로 본관이 곡산 연씨, 상주공파 26세손(우羽 자 항렬)이며 초명은 연민수, 이명은 연기호·연봉렬이라고 소개합니다. 아버지는 연소득이고 세 아들 가운데 맏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생 연도와 출신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강화진위대 부교 출신이라는 설과 적성의 선비라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부하였던 강호여의 회상에 따르면 나이는 50세 이상이었고 성균관 진사로 학식이 높고 애국심이 강한 인물로 존경받았다고 합니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강화도 진위대가 의병으로 전환했고, 8월 일본군이 강화읍성을 기습해 강화 의병이 육로로 후퇴할 때 연기우는 장단군 덕울포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해 가을 허위 등 의병장들의 서울 진공작전에 참가했고, 1908년 1월 이인영이 13도창의대진소 대장으로 추대되자 대대장을 맡아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습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퇴각하던 중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우 연창수는 붙잡혀 처형되었다고 전합니다.
이후 마전과 장단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고 다른 의병장들과 연합해 포천·삭녕·철원·연천·적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1909년 5월 강원도 이천에서 프랑스인 천주교 전도사의 집을 습격해 탄환과 총기를 얻었고, 북간도의 이범윤을 통해 신무기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군자금은 부민과 면장에게서 마련했는데, 부하가 군자금을 사사로이 쓰려 하면 즉시 되찾을 만큼 공금 관리가 엄격했다고 전해집니다. 방탄 요갑을 차고 다녔다는 일화도 있으며, 1910년 6월 철원 헌병대가 삭녕에서 그의 방탄 요갑을 압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10년 3~4월 일본군의 대대적인 작전으로 중군장 김중운, 선봉장 연성칠 등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었고, 본인도 철원에서 체포되었다가 부하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습니다. 최후는 자료가 갈립니다. 1911년 12월 28일 매일신보는 가평 파견소 헌병대가 사살했다고 보도했지만, 1914년 6월 28일 매일신보는 인제분대 헌병이 '연기우 부자'를 체포해 취조 중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아 사망 시기를 1911년경으로만 표시합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15년 8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묘소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연기우의 출생·최후·신분은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신분은 강화진위대 부교 설과 적성의 선비 설이 있고, 최후는 1911년 가평 사살설과 1914년 인제 체포설이 병기됩니다. 곡산 연씨 상주공파 26세손이라는 점은 『곡산연씨대동보』에 근거합니다. 문중 전체는 곡산 연씨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알려져 있지 않음
1910년과 1914년 기사에 아들이 언급되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곡산 연씨 상주공파 26세손으로 『곡산연씨대동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