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학파의 선구로 꼽히는 성리학자,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함께 받은 6현의 한 사람, 호는 회재, 시호 문원

| 생몰 | 1491 ~ 1553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여주 이씨 |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입니다. 본관은 여주(여강)이며 여주 이씨 경주파의 11세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시호는 문원(文元)입니다.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손중돈의 보살핌 속에 자랐으며, 1514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1517년에는 무극태극 논쟁에 뛰어들어 주희의 이(理) 중심 해석에 기대 상대를 비판했는데, 이 논쟁은 조선 성리학 최초의 철학 논쟁으로 평가됩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희생되자 벼슬을 사양하고 외직을 청해 인동현감과 밀양부사를 지내며 선정을 폈습니다. 1531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낙향한 그는 자옥산에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몰두했고, 김안로가 몰락한 뒤인 1537년 다시 조정에 나가 1538년 청백리로 뽑혔습니다. 이후 대사헌·부제학·이조·형조·예조판서·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인종 때는 좌찬성에 올랐습니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북도 강계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대학장구보유』『구인록』『봉선잡의』를 쓰다 1553년 『중용구경연의』를 집필하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1568년 영의정에 증직되고 1569년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610년 문묘에 종사되어 문묘와 종묘 양쪽에 모셔진 6현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517년의 무극태극 논쟁에서 이언적은 이(理)가 기(氣)에 앞서고 이와 기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입장을 폈습니다. 이 견해는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되며, 이황은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기고 행장을 지었다고 합니다.
저술로는 인(仁)의 본체와 실현을 다룬 『구인록』, 주희의 『대학장구』를 독자적으로 재배치한 『대학장구보유』, 예서 『봉선잡의』, 그리고 강계에서 쓰다 끝맺지 못한 『중용구경연의』가 꼽힙니다. 다만 『대학』을 고쳐 읽은 점은 후대에 논란도 낳았습니다.
기묘사화 때는 조정을 떠나 외직을 청했고, 을사사화 때는 추관으로 사림을 심문하면서도 관대한 판결을 내려 훗날 비판과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이는 그가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해결을 모색했다는 평가도 함께 전합니다. 훈구와 사림이 맞서던 시대에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된 일은 그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1573년 경주 옥산서원에 주향되어 사액을 받았고,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독락당과 옥산서원은 경주 안강 일대 여주 이씨 경주파의 대표 유적이며, 양동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경주파의 주요 세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신도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양자 이응인의 다섯 아들이 무첨당파·양졸당파·설천정파·수졸당파·오의정파를 이루었고, 서자 이전인의 후손은 옥산 쪽 구암공파·치암공파로 갈라졌습니다.
아닙니다. 본관은 여주(여강)이며, 경주에 산 여주 이씨 경주파입니다. 경주는 세거지입니다.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함께 받은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언적입니다. 1569년 명종 묘정에 배향되고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