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李昇薰

오산학교를 세운 교육자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는 남강, 독립유공자

남강 이승훈의 사진
남강 이승훈의 사진 ·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생몰1864 ~ 1930
시대대한제국·일제강점기
본관여주 이씨

생애 약력

이승훈(1864~1930)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본관은 여주, 호는 남강(南岡), 본명은 인환(寅煥)입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놋그릇 가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후 놋그릇 행상과 공장 경영으로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실업가가 되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무역회사 계획이 무산되어 파산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 이승훈(1756, 평창 이씨)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입니다.

1905년 을사조약 뒤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40대에 교육과 사회운동에 나섰고,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조만식을 교사로 맞았고 오산학교에서는 류영모·함석헌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1910년 장로교 신자가 되어 1916년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형을 받았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 기독교 측 대표로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해 3년형을 받았고, 이 일로 오산학교가 큰 피해를 입었으나 같은 해 7월 학교를 재건했습니다. 1922년 가출옥한 뒤에는 이상재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와 조선교육협회에 관여했고, 오산학교 교장과 이사장으로 교육을 이어갔습니다. 1930년 세상을 떠나며 시신을 경성제국대학에 교육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교육 구국운동

오산학교는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함께 서북 지역 민족주의 교육의 두 축으로 꼽힙니다. 3·1운동 뒤 교원들이 검거되고 학교와 교회가 불타는 피해를 입었으나, 조만식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에 재건되었습니다. 이승훈은 가출옥 뒤에도 용동에서 공동경작제를 실시하는 등 지역 활동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한때 이상재(이상재)·윤치호·김성수 등과 민립대학 기성회 모금 활동을 벌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서훈과 기림

그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며, 1999년 12월 '이 달의 문화 인물', 2001년 3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고 소개됩니다.

이승훈 자주 묻는 질문

남강 이승훈과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 이승훈은 같은 사람인가요?

다른 사람입니다. 남강 이승훈은 1864년생 여주 이씨 독립운동가이고, 최초의 세례 교인은 1756년생 평창 이씨입니다.

오산학교는 어떤 학교였나요?

이승훈이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민족주의 교육기관으로, 조만식을 교사로 영입했고 류영모·함석헌 등을 배출했다고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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