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렴 裵克廉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재상, 조선 개국공신 1등 (성산백·정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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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1325 ~ 1392
시대고려 말~조선 초
본관성주 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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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약력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이자 재상으로 성주 배씨이다. 진주·경상도 일대의 지방관·원수로 왜구 방어에 힘썼고, 1388년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다.

1392년 조준·정도전과 함께 왕대비의 교지를 받아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어 문하좌시중에 올랐고 성산백에 봉해졌으나,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정절이다.

출생과 가문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은 성주 배씨로, 1325년(충숙왕 12) 경상도 성주(星州)에서 배현보(裵玄甫)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전한다. 자는 양가(讓可 또는 양가), 호는 주금당·필암이라고 하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증조부는 배유, 조부는 배신경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성주 이씨로, 『태조실록』 졸기 해석에 따르면 이천년의 딸이어서 고려 후기 권신 이인임과 육촌 관계가 된다는 설명이 있다. 형으로 배극귀가 있다. 다만 자료에 따라 이름 표기와 본관 표기(성주·경산 등)가 다르게 나타난다.

고려 조정에서의 출사

문음(門蔭)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갔다고 하며, 1353년(공민왕 2) 무렵부터 진주·상주 목사, 계림(경주)·화령(함흥 일대) 부윤, 합포진 첨사 등을 거친 것으로 전한다. 주로 남부 해안·내륙 지방의 수령과 군사 직책을 맡은 이력이 특징이다.

우왕 때에는 경상도 도순문사·도원수 등 방어 책임자로 활동했고, 합포(오늘날 창원 일대)의 성을 쌓는 일을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 문신 중심 조정에서 무신 지방관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왜구 토벌

1376년(우왕 2) 왜구가 경상도를 침입하자 진주도원수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부원수·강주원수·경상도 도순문사로 율포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했으나, 같은 해 말 김해·의창 일대를 침공한 대규모 왜선단에는 크게 패했다고 한다. 1378년에는 욕지도와 사주(사천) 방면에서 왜구를 쳐서 승리했다.

1379년에는 진주를 공격한 왜구를 반성현에서 물리치고 울주·사주에서도 전과를 올렸으나, 1380년 함양 사근내역 전투의 결과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전한다(승리로 적은 기록과 큰 피해를 입은 패전으로 적은 기록이 있다). 같은 해 이성계가 지휘한 황산(운봉) 대첩에 배극렴이 참전했다고 서술한 자료는 확인하지 못했으며, 이 글에서는 그 점을 단정하지 않는다.

위화도 회군

1388년(우왕 14) 명의 요동을 공격하라는 출병 명령이 내려지자, 배극렴은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의 우군 조전원수로 종군했다. 압록강 가운데의 위화도에서 군을 돌려 개경으로 향한 회군에 참여하여, 최영 등 기존 실권자들이 물러나는 정변에 가담한 것으로 전한다.

회군 뒤 1389년에는 판개성부사·문하찬성사 등을 지냈고 명에 하정사로 다녀왔다고 하며, 1390년에는 회군공신에 추록되었다.

한양 궁궐 수축과 고려 말 요직

1390년 양광도 찰리사로서 한양 궁궐 조성·수리를 감독했고, 같은 해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부 중군총제사를 맡아 군권의 한 축이 되었으며, 한양 궁궐 수리 책임도 다시 맡았다고 한다. 개경 내성 축조를 총괄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1392년 4월 수문하시중에 임명된 뒤 판삼사사·우시중을 역임했다. 이 시기 그는 이성계 세력의 핵심 무장·재상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조선 건국과 이성계 추대

1392년 7월 정몽주 제거 이후 대세가 기운 가운데, 배극렴은 조준·정도전 등과 함께 왕대비(공양왕의 모후 격인 대비 안씨)의 교지를 받아 공양왕을 폐위하는 절차를 주도한 것으로 전한다. 『태조실록』에는 그가 대비에게 폐위를 건의하고 국새를 가져오는 등의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문무백관이 이성계의 집에 나아가 즉위를 청했고, 7월 17일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건국 직후인 8월에는 세자 책봉 논의에서 조준·정도전과 함께 의안대군 방석을 세우자는 건의에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적장자 계승을 주장했다는 전언도 있다(정몽주 관련 사건과 세자 논의의 세부는 자료마다 다르다).

개국공신 책록과 관직

1392년 8월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올라 조선 초대 수상격인 자리를 맡았다. 영의정부사 재임(7월 28일~11월 26일) 기록도 전한다. 성산백(星山伯, 성주의 옛 이름에 따른 봉호로 이해되며 성주백이라고도 적는다)에 봉해지고 식읍 1천 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해 9월에는 학교·수령·의창·향리 등 국정 운영 방향에 관한 22개 조목을 태조에게 올렸다고 하며, 고려와 조선 두 나라에서 모두 정승을 지낸 인물이 되었다.

죽음과 묘소

1392년 11월 26일(양력 12월 중순)경 병으로 사직한 뒤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태조실록』 졸기는 향년 68세로 적었으나 출생 연도 계산상 66~67세로 보기도 한다. 태조는 3일간 조회를 멈추고 고기 반찬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묘소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두타산 대아봉 기슭)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분 앞에 문인석·석양·장명등 등이 남아 있다.

가족과 후손

부인은 순흥 안씨이다. 일부 자료는 딸 한 명이 영평군 반자건에게 시집갔다고 하며, 『태조실록』 졸기에는 아들이 없었다고 적혀 있다는 설명도 있어 대를 잇는 후손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설명이 엇갈린다. 성주 배씨 안에서 그를 중시조로 삼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평가와 기록

『태조실록』 졸기는 그가 청렴하고 검소하며 지방관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방어에는 능했으나 공격에는 뛰어나지 않았다고 평하는 한편, 학문이 부족해 임금에게 올린 의견이 적고 세자 책봉에서 왕의 뜻을 따랐다는 비판도 남겼다. 정도전의 악장 「수보록」에서는 '군자의 지혜'로 묘사되었으나, 태종 때 재임이 짧고 공이 없다는 이유로 악부에서 빼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중매체에서는 KBS 「용의 눈물」(1996), 「정도전」(2014) 등 사극에 등장한다.

묘소

정절공 배극렴의 묘소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 산28번지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손

부인은 순흥 안씨이며, 딸 한 명이 반자건에게 출가했다고 전한다. 『태조실록』 졸기에는 아들이 없었다고 적혔다는 설명이 있어 후손 계보는 자료마다 엇갈린다.

관련 사진

충북 증평 배극렴 묘소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1유형 · Wikimedia Commons)
충북 증평 배극렴 묘소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1유형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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