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 때 피난선으로 수군을 후방에서 도운 선비, 사호공파 파조, 호는 사호(沙湖)
| 생몰 | 1557 ~ 1643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함양 오씨 |
오익창(吳益昌, 1557~?)은 조선 중기의 선비로 본관은 함양, 자는 유원(裕遠), 호는 사호(沙湖)입니다. 위키백과는 1557년(명종 12) 전라도 무장현(지금의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643년 고창 심원면에서 79세로 별세했다고 적지만, 사호집 해제는 생몰을 1557~1635로 소개해 사망 연도가 갈립니다. 참판 오치선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진사 오인,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전하고, 1579년 진사시에 입격했습니다. 아들로 오전과 오엽이 전합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이 전선 12척만 거느린 것을 본 전라도 연안 주민들이 피난길에 오르자 이들을 설득해 피난선을 수군의 후방 지원에 쓰게 했습니다. 또 의복과 군량을 공급하고 솜이불을 물에 적셔 배에 펼쳐 총탄을 막도록 했다고 전합니다. 문집은 그가 외딴 섬으로 피하려는 사대부들에게 통제사가 무너지면 모두가 위태롭다고 호소해 군량을 지원받았다고 기록한다고 합니다.
광해군 때인 1613년 임해군 역모 사건을 평정한 공로로 익사원종공신 1등에 참록되었으나, 이이첨의 국정 운영에 회의를 느껴 공조정랑 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심원동에서 시를 짓고 후학을 길렀으며,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란하자 도내에 격문을 보내 식량을 모아 강화도로 실어 날랐습니다. 문집 『사호집』은 1773년(영조 49) 7대손 오성열이 3권 2책으로 간행했고, 1713년 전라도 유림이 죽산사를 세워 그를 배향했습니다. 함양 오씨 사호공파의 파조로 전합니다.
1597년 이순신이 전선 12척으로 적을 맞게 되자 전라도 연안 주민들이 피난에 나섰는데, 오익창은 이들을 설득해 피난선을 수군의 후방에 돌려 지원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솜이불을 물에 적셔 배에 펼쳐 총탄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집니다.
함양 오씨 가운데 사호공파는 그를 파조로 합니다. 1713년 세운 죽산사는 전라도 유림의 공론으로 그를 배향한 사당입니다. 고창은 시조 오광휘의 10대손 오세영이 입향한 이래 함양 오씨의 집성촌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창 심원면에서 별세했다고 하며,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전북 고창의 죽산사에 배향되었습니다.
아들로 오전과 오엽이 전합니다. 7대손 오성열이 1773년 『사호집』을 간행했습니다.
피난하려는 전라도 연안 주민들을 설득해 피난선으로 수군의 후방을 지원하게 했고 군량과 의복을 공급했다고 전합니다.
위키백과는 1643년(79세)으로, 사호집 해제는 1635년으로 적어 자료가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