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권율·이순신의 진중을 오가며 전황을 보고한 선전관, 황간현감, 호는 문월당
| 생몰 | 1559 ~ 1616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함양 오씨 |
오극성(吳克成, 1559~1616)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함양,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입니다. 경북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에서 헌릉참봉 오민수(吳敏壽)와 무안 박씨 참봉 박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오필은 조선 초 무인이었고, 아버지는 지역 최초의 교육기관인 영산서당을 세우는 데 참여한 선비로 전합니다. 동생은 오윤성이며, 아들은 오연입니다. 호 '문월'은 이백의 시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병환으로 출전하지 못한 그는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는 글을 벽에 걸고 병법과 심신 단련에 힘썼고, 윤두수·곽재우·김성일 등에게 편지로 군사 모집과 경상도 방어를 건의했다고 합니다. 1594년 1월 동생과 함께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었습니다. 전선의 소식이 끊기자 자원해 백성의 옷차림으로 낮에는 숨고 밤에 움직이며 삼남을 돌았고, 도원수 권율과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진중을 찾아다니며 장계로 전황을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선조에게서 '참으로 충신이다'라는 평을 받고 한 달 만에 사복시 주부로 승진했다고 합니다.
1596년 황간현감이 되어 민심을 수습했고, 정유재란 때 병사를 도와 전공을 세웠으며 1598년에는 이순신 휘하에서 노량해전에 참전했다고 전합니다. 이때 군복 입힌 허수아비를 해안에 세워 적이 포위되었다고 착각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1601년 훈련원 판관, 이후 봉상시정을 지내고 1602년 무과 출신으로는 드물게 시독관에 올랐으나, 관직을 사고파는 것은 옳지 않다며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습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에 올랐고 1616년 11월 58세로 별세했으며, 문집 『문월당문집』이 전합니다. 임진왜란 때의 일기도 후대에 전해지나 그 경위는 자료마다 달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2016년 영양군은 어린이도 읽기 쉽게 만든 위인전 『붓을 던져 나라를 구한 문월당 오극성』(110쪽)을 펴냈습니다. 글과 무예를 함께 익힌 그가 임진왜란 중 문에서 무로 길을 바꾼 이야기를 다룹니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해안을 따라 군복 입힌 허수아비를 세워 적이 포위되었다고 착각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그가 이순신 진중에서 세운 공으로 녹훈되었다고 기록한다고 전합니다.
영양읍 대천리에 있는 오극성 고택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ㅁ자형 건물입니다. 고택에서 백여 걸음 남쪽의 정자 문월당은 화재로 소실된 뒤 1969년 다시 세워졌습니다. 영양 대천리는 함양 오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꼽힙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영양 대천리에는 그의 고택(경북 문화재자료 제498호)과 정자 문월당이 있고, 일월면 명고서원에 위패가 모셔졌다가 1871년 서원 철폐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동생 오윤성, 아들 오연이 함께 문월당공파(용계·우재·취수당)의 뿌리로 전합니다. 고택은 1760년경 현손 오학지가 고쳤고, 문월당 정자는 화재로 소실된 뒤 1969년 주손 오창목이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선전관으로 권율과 이순신의 진중을 오가며 전황을 조정에 보고한 함양 오씨 무신으로 호는 문월당입니다.
경북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에 있는 정자이며, 그의 고택이 인근에 있습니다.
『문월당문집』이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