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 이씨 족보·가계도

우리집안 온라인 족보 만들기

전의 이씨(全義 李氏) — 고려 개국을 도운 이도(李棹)를 시조로 받드는 본관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을 본관지로 하며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188명과 영의정 이탁 등 정승·청백리를 배출했습니다.

인구 — 약 164,189명 (2015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전의 이씨란

고려 개국을 도운 이도(李棹)를 시조로 받드는 본관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을 본관지로 하며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188명과 영의정 이탁 등 정승·청백리를 배출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전의 이씨 인구는 약 164,189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이씨라도 본관(전의)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전의 이씨(全義 李氏)

본관의 유래

전의 이씨는 옛 충청도 전의현(全義縣), 오늘날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일대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전의는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금지현(金地縣)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고려 때 전의현으로 고쳐져 청주목에 속했습니다. 조선 태종 때인 1414년 연기현과 합쳐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다시 나뉘었고, 1895년 전의군으로 승격했으나 1914년 연기군에 통합되어 전의면·전동면·소정면이 되었습니다. 2012년 연기군이 세종특별자치시가 되면서 지금은 세종시에 속합니다.

전의는 예로부터 전성(全城)·전산(全山)·전은(全恩)이라고도 불렸기 때문에, 옛 문헌에는 전의 이씨를 전성 이씨·전산 이씨로 적은 예도 보입니다. 조선 시대에 전의 이씨 공신들이 전성군(全城君)·전산군(全山君)으로 봉해진 것도 이 옛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조 이도와 금강 도하 전승

족보와 문중 전승에 따르면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입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치러 남쪽으로 내려와 금강(錦江)에 이르렀을 때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자, 그가 배를 마련하고 길을 열어 군사가 강을 건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태조는 이 공을 기려 배를 젓는 '노'를 뜻하는 '도(棹)'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고, 그는 삼한개국익찬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에 이르렀다고 전합니다. 일부 문중 자료는 그를 공주 출신으로 소개하며, 후손이 전의의 이성산(李城山) 아래에 자리 잡으면서 전의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정사(正史)보다는 족보와 신도비문에 전하는 전승입니다.

시조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에 있고, 묘소 건너편에는 시조 태사공을 모시는 재실 영사재(永思齋)와 사당 경원사(景遠祠)가 있어 후손들이 해마다 제향을 올립니다. '영사재'는 시조를 길이 추모한다는 뜻을 담은 이름입니다.

고려 시대 — 세 대파의 형성

족보에 따르면 시조 이후 이강(李康)–이수영(李秀英)–이문경(李文景)–이윤관(李允寬)–이순(李順)으로 대가 이어졌고, 7세 이천(李仟)이 응양군 대장군에 올랐습니다. 《고려사》에 이천(李阡)으로 기록된 그는 1256년(고종 43) 수군을 이끌고 몽골군을 막아 온수현(지금의 아산 온양)에서 적을 베고 사로잡힌 백성 100여 명을 구해 낸 장수입니다.

이천의 세 아들 대에서 오늘날 전의 이씨의 뼈대가 되는 세 대파가 갈렸습니다. 장남 이자원(李子蒝)은 대사성공파, 차남 이혼(李混)은 문장공파, 셋째 이자화(李子華)는 전서공파의 파조입니다. 이혼은 1268년 과거에 급제해 충렬왕·충선왕 때 밀직사의 요직을 거쳐 첨의정승으로 물러났고 시호는 문장(文莊)입니다. 이자원의 아들 이언충(李彦冲, 1273~1338)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이자화는 지밀직사사·선부전서를 지냈습니다.

일부 계통은 따로 본관을 세웠습니다. 문장공 이혼의 계통에서 예안(禮安)을 본관으로 하는 예안 이씨가 나왔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혼이 예안백(禮安伯)에 봉해져 예안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적고, 다른 자료는 그의 손자 이익(李翊)이 예안군에 봉해지면서 분적했다고 설명해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오늘날 두 성씨는 '전의·예안 이씨 화수회'로 함께 모입니다. 또 이언충은 뒤에 서림 이씨의 시조로 받들어졌다고도 전합니다.

조선 시대 — 효행과 청백리의 가문

조선 초 전서공파의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흔이 넘은 노모를 극진히 모신 효행으로 세종에게서 궤장(几杖)과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여덟 글자를 받아 전의 이씨의 중시조로 받들어집니다. 그의 손자 대에 이효장·이의장·이예장·이지장·이함장 형제가 문무과에 잇따라 올라 이름을 떨쳤습니다. 이예장은 계유정난의 공으로 정란공신이 되어 전성군에 봉해졌고, 이함장의 아들 이수남은 좌리공신으로 전산군에 봉해졌으며, 이 형제들이 저마다 전서공파 안의 중파를 이루었습니다.

16세기 이후에도 인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탁(李鐸)은 선조 때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고, 이준민(李俊民)은 남명 조식의 생질로 병조판서·좌참찬을 지냈습니다. 청강 이제신(李濟臣)은 청백리에 올랐고, 그의 증손 이행원(李行遠)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고 소현세자를 심양까지 모신 뒤 인조 때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주성을 지킨 이정란(李廷鸞), 선조를 호종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시인 이순인(李純仁), 이정란의 증손으로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힌 만암 이상진(李尙眞)도 이 가문 사람입니다. 태종의 서녀 경신옹주와 혼인한 부마 이완(李梡)은 전의군(全義君)에 봉해졌습니다.

위키백과가 정리한 통계에 따르면 전의 이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188명을 배출해 전체 성관 가운데 17위에 올랐고, 상신(정승) 5명, 대제학 1명, 공신 9명, 청백리 8명, 호당 4명, 삼도수군통제사 14명, 부마 2명, 시호를 받은 인물 38명(고려 포함 41명), 궤장을 받은 인물 3명을 냈다고 합니다.

족보 편찬도 이른 편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476년(성종 7) 이하가 전의 이씨를 중심으로 외가 계통까지 아우른 초보(草譜)를 만들었는데, 원본은 전하지 않고 후대 족보에 그 손자 이린(李麟)이 쓴 서문만 실려 있으며 문중에서는 이를 '성화초보(成化草譜)'라 부릅니다. 이후 1634년의 숭정보, 1754년의 영조 갑술보 등이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근현대

대한제국의 외교관 이한응(李漢應, 1874~1905)은 주영 서리공사로서 한국의 독립 보장을 영국에 호소하다가 국권이 기울자 1905년 런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을사늑약을 전후한 순국의 첫머리가 되었습니다.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국어대사전》을 펴냈으며, 화가 고암 이응노는 문자추상과 '군상' 연작으로 세계 미술계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 밖에도 정치·법조·언론·학계·문화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후손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구와 세거지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의 이씨는 1985년 26,970가구 112,088명, 2000년 41,071가구 133,237명, 2015년 164,189명으로 꾸준히 늘었습니다. 2015년 기준 전체 성관 가운데 59위이며, 이씨 가운데서는 전주·경주·성주·광주 이씨 다음인 다섯째 규모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전의 이씨에서 갈라진 예안 이씨는 17,748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후손은 전국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위키백과에 정리된 주요 세거지를 보면 본관지와 가까운 충청남도 공주·논산·아산·천안·예산과 충청북도 청주(옛 청원 오창·옥산)·충주·진천·음성·증평, 경기도 김포·파주·양평·광주·화성·이천, 강원도 홍천·횡성·춘천·원주, 전라북도 전주·완주·익산·김제, 전라남도 나주·영광과 광주광역시, 경상북도 안동·영주·봉화·청송·고령, 경상남도 의령·합천·산청, 그리고 서울 종로·구로와 인천 강화 교동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북한 지역의 개풍·해주·용강 등지에도 살았다고 전합니다.

항렬

전의 이씨는 대사성공파와 전서공파가 각각 항렬을 써 오다가 32세부터 '상(相)' 자로 통합해 이후 대동항렬을 함께 씁니다. 대동항렬은 32세 상(相)○, 33세 ○섭(燮), 34세 기(基)○, 35세 ○진(鎭), 36세 원(源)○, 37세 ○수(秀), 38세 용(容)○, 39세 ○균(均), 40세 석(錫)○ 순입니다. 그 앞 대에서 대사성공파는 26세 윤(潤)○, 27세 ○식(植), 28세 희(熙)○, 29세 교(敎)○, 30세 ○호(鎬), 31세 한(漢)○을, 전서공파는 26세 ○민(敏), 27세 근(根)○, 28세 ○노(魯), 29세 ○세(世), 30세 종(鍾)○, 31세 ○호(浩)를 썼습니다.

왕실과의 혼인

전의 이씨는 조선 왕실과 여러 차례 혼인을 맺었습니다. 태종의 서녀 경신옹주는 이완에게, 정종의 서녀 인천옹주는 이관식에게 출가했고, 정종의 아들 덕천군, 성종의 아들 운천군·양원군, 선조의 딸 정신옹주 집안과도 사돈을 맺었습니다. 한편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의 묘지명에는 본관이 전의로 적혀 있으나, 본래 전주 이씨였던 것을 동성 혼인을 피하려고 고쳐 적은 것이라 하여 전의 이씨 문중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친회

후손들은 전의·예안 이씨 화수회를 중심으로 시조 묘소와 영사재의 제향을 받들고 있으며, 청강공파·석탄공파·부정공파 등 여러 파종회도 따로 누리집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요 파(派)

대사성공파, 문장공파, 전서공파, 관찰사공파, 평간공파, 예조참판공파, 청강공파, 효익공파

대사성공파 (大司成公派)

대사성공파는 시조 이도(李棹)의 7세손인 응양군 대장군 이천(李仟)의 장남 이자원(李子蒝)을 파조로 합니다. 이자원은 직문한서(直文翰署)를 지냈고 대사성에 추증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언충(李彦冲, 1273~1338)은 1294년 과거에 급제한 뒤 충렬왕부터 충혜왕까지 네 임금을 섬기며 정당문학·도첨의평리·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의(文義)입니다. 이언충은 뒤에 서림 이씨의 시조로 받들어졌다고도 전합니다.

13세에 이르러 진원현감공 대종파, 감찰공 대성파, 도절제사공 승간파, 소윤공 성간파, 형조정랑공 직간파, 정선군수공 강지파, 양정공 화파, 옥계공 남파, 진산군수공 영간파, 중추원사공 의흡파 등 18개 중파로 나뉘었습니다. 이 가운데 형조정랑공 직간파는 인구가 많은 편이고, 도절제사공 승간파에서는 병조판서·좌참찬을 지낸 이준민의 효익공파가 갈라졌습니다. 옥계공 남파는 조선 시대에 '문의 이씨(文義 李氏)'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문장공파 (文莊公派)

문장공파는 이천(李仟)의 둘째 아들 이혼(李混, 1252~1312)을 파조로 합니다. 초명은 이자분(李子芬), 자는 거화(去華), 호는 몽암(蒙菴)으로, 1268년(원종 9) 과거에 급제한 뒤 밀직사의 여러 관직과 서북면 도지휘사를 거쳤고,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벽상삼한공신에 녹훈되었습니다. 숙비의 미움을 받아 지방 목사로 밀려나기도 했으나 첨의정승으로 치사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입니다.

이혼의 계통은 일찍 예안(禮安)을 본관으로 따로 세워 예안 이씨가 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혼이 예안백에 봉해져 예안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적고, 다른 자료는 그의 손자 보문각제학 이익(李翊)이 예안군에 봉해지면서 분적했다고 설명합니다. 13세에서 익양공 천(蕆)파와 이판공 온(鞰)파의 2개 중파로 나뉘며, 두 파 모두 예안 이씨로 불립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예안 이씨는 17,748명이었습니다.

전서공파 (典書公派)

전서공파는 이천(李仟)의 셋째 아들 이자화(李子華)를 파조로 합니다. 이자화는 지밀직사사와 선부전서를 지냈으며, 형 이혼이 인사를 맡고 있을 때 충선왕이 그를 행수로 삼으려 하자 이혼이 형제가 함께 요직을 맡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합니다. 이자화의 증손 이구직(李丘直, 1339~1394)은 원종공신이 되었고, 그 아들이 효행으로 이름난 효정공 이정간입니다.

이정간의 손자 대에 효장·의장·예장·지장·함장 형제가 문무과에 잇따라 급제해 명성을 떨쳤고, 이들을 비롯한 후손이 13세에서 25개 중파로 나뉘어 전의 이씨 가운데 가장 많은 지파를 이룹니다. 참판공 순백파, 하동현감공 의장파, 평간공 예장파, 주서공 지장파, 예조참판공 함장파, 관찰사공 효장파, 양간공 서장파, 양호공 병정파 등이 있으며, 예조참판공 함장파는 인구가 많은 편입니다. 양간공 서장파에서는 청강 이제신의 청강공파가 갈라졌습니다.

관찰사공파 (觀察使公派)

관찰사공파는 효정공 이정간의 손자이자 한성부윤 이사관(李士寬)의 아들인 이효장(李孝長)을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의 중파입니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딸입니다. 이효장은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에 나아갔다가 1447년(세종 29) 식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대교가 되었고, 1452년 승문원 부교리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1457년(세조 3) 문과 중시에 급제한 뒤 이조참의·호조참의를 지냈고, 해청(매)을 바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참의가 되었습니다.

이어 가선대부로 대사헌에 올랐고, 1462년 중추원부사를 거쳐 1463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 이름 '관찰사공'은 그의 마지막 벼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무과에 급제한 아우 의장, 문과에 급제한 예장·지장·함장과 더불어 다섯 형제가 모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합니다.

평간공파 (平簡公派)

평간공파는 이정간의 손자이자 이사관의 아들인 이예장(李禮長, 1406~1456)을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의 중파입니다. 자는 자문(子文)이고 시호가 평간(平簡)이어서 평간공파라 부릅니다. 이예장은 1432년(세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1448년 안숭선의 옥사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1453년(단종 1)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도운 공으로 정란공신 3등에 책록되어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는데, '전성'은 본관 전의의 옛 이름입니다. 이듬해 첨지중추원사로 지병조사를 겸했고, 1455년 병조참의에 올랐으며 세조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형 이효장(관찰사공파), 아우 이함장(예조참판공파) 등과 함께 전서공파의 여러 중파를 이루었습니다.

예조참판공파 (禮曹參判公派)

예조참판공파는 이정간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해 예조참판을 지낸 이함장(李諴長)을 파조로 하며, 위키백과의 계파 정리에 따르면 전의 이씨 여러 파 가운데 인구가 많은 편입니다. 이함장의 아들 이수남(李壽男)은 1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8년(세조 4) 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며, 1465년 문과 중시와 발영시에 연이어 급제해 동부승지·우승지·병조참의를 지냈습니다.

이수남은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4등으로 전산군(全山君)에 봉해지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3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양간(良簡)입니다. 그의 아들 이한원(李翰元)은 중종 때 공신으로 전성군에 봉해졌다고 전하며, 묘소는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에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홍천 서석면 풍암리는 오늘날에도 전의 이씨의 세거지로 꼽힙니다.

청강공파 (淸江公派)

청강공파는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을 파조로 하는 파로, 위키백과의 계파 정리에 따르면 전서공파의 양간공 서장(恕長)파에서 갈라진 지파입니다. 이제신은 1564년 문과에 급제해 울산군수·진주목사·강계부사를 지내며 아전의 탐학을 막는 등 선정을 펼쳤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1583년 니탕개가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되자 책임을 지고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에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시호는 평간(平簡)입니다.

그의 증손 대에서 인조 때 우의정에 오른 서화 이행원(李行遠)과 개성유수·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지암 이행진(李行進)이 나와 가문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이제신의 문집 《청강집》에는 '청강선생세계급자손보'가 실려 있어 고려 시대 전의 이씨 선대의 계보를 살피는 자료로도 쓰입니다. 청강공파는 따로 파종회와 누리집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효익공파 (孝翼公派)

효익공파는 시호가 효익(孝翼)인 이준민(李俊民, 1524~1590)을 파조로 하며, 위키백과의 계파 정리에 따르면 대사성공파의 도절제사공 승간(承幹)파에서 갈라진 지파입니다. 이준민은 참봉 이공량(李公亮)의 아들로, 어머니가 조언형의 딸이어서 영남의 대학자 남명 조식(曺植)이 그의 외숙입니다.

1549년(명종 4)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홍문관 수찬 등을 거쳤고, 선조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와 평안도관찰사로 오랫동안 북방 방비를 맡았으며 병조판서·지의금부사·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습니다. 동서 붕당이 일어나자 이를 걱정하며 당론을 조정하려던 이이를 존경했고, 1584년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를 공격하는 논의에 강하게 맞섰습니다. 진주 임천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사위 조원(趙瑗)과 외손자 조희일(趙希逸)도 이름난 문신으로 그 집안과의 인연이 깊습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대표 인물

이천(고려 무신·몽골군 격퇴), 이혼(고려 첨의정승·문장공파 파조), 이정간(조선 초 효행·궤장, 중시조), 이탁(선조 때 영의정), 이준민(병조판서·효익공), 이제신(청백리·청강공파 파조), 이순인(팔문장·시인), 이정란(임진왜란 전주성 수성), 이행원(인조 때 우의정·청백리), 이상진(숙종 때 우의정·청백리), 이한응(주영 서리공사·순국지사), 이희승(국어학자), 이응노(화가, 호 고암)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전의 이씨 가계도, 이렇게 만드세요

  1. 나부터 등록 — 로그인하면 나만의 트리가 생깁니다. 본인 이름·생년·본관(전의)을 입력합니다.
  2. 윗대 올리기 — 부모·조부모를 추가합니다. 정확한 확인은 제적등본으로 조상 찾기를 참고하세요(보통 5대까지).
  3. 형제·자녀 연결 — 항렬(돌림자) 순으로 정렬하면 세대가 한눈에 정리됩니다.
  4. PDF·공유 — 완성한 가계도를 PDF로 저장하고 가족을 초대해 함께 관리합니다.
전의 이씨 족보·계보도를 온라인으로. 종이에 그리다 지우지 말고, 무료로 시작해 계보를 세대별로 자동 정리하세요.

함께 보면 좋은 글

가계도 무료로 그리는 법온라인 족보 만들기 단계별 가이드 본관·파·항렬 완벽 정리뜻과 세대 정리법

전의 이씨 종친회

전의 이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전의 이씨 족보·가계도 정보 추가/수정 요청하기무료로 족보 시작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