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때 세 차례 영의정, 청백리·대제학
| 생몰 | 1504 ~ 1585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남양 홍씨 |
홍섬(洪暹, 1504~158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시호는 경헌(景憲)입니다. 본관은 남양 토홍계이고, 영의정 홍언필의 아들이며 조광조의 문인입니다. 외할아버지 송질도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1528년 생원이 되고 1531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1535년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권신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 허항의 무고로 전라도 흥양에 유배되었는데, 이때 억울한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寃憤歌)」를 지었습니다. 김안로가 몰락한 뒤 풀려나 부제학·경기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지냈습니다.
1552년(명종 7) 청백리에 뽑혔고, 좌찬성 겸 이조판서로 있을 때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세 가지 중임을 함께 맡을 수 없다며 좌찬성을 사양했습니다. 1560년 권신 이량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물러났으나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해 예문관·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습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예조판서로서 원상이 되어 정무를 처결했습니다.
1568년 우의정, 1571년 좌의정에 올라 궤장을 하사받았고, 1574년·1575년·1578년 세 차례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했다고 합니다. 1585년 세상을 떠난 뒤 남양의 안곡사에 제향되었고, 1591년 종계변무가 이루어지자 광국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습니다. 저서로 『인재집』과 『인재잡록』이 있습니다. 딸은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원군과 혼인했습니다.
아버지 홍언필에 이어 부자가 대를 이어 영의정에 오른 것으로 이름났으며, 조선 시대 토홍계가 낸 상신 두 사람이 바로 이 부자입니다. 신도비명은 김귀영이 지었으며 『동원집』에 실려 있습니다.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심수경의 딸과 혼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