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홍씨(南陽 洪氏) —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을 1세조로 하는 당홍계로, 홍씨의 대표적 계열로 전해집니다.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을 1세조로 하는 당홍계로, 홍씨의 대표적 계열로 전해집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남양 홍씨 인구는 약 379,708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홍씨라도 본관(남양)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남양 홍씨(南陽 洪氏)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일대를 본관으로 합니다. 같은 본관 안에 당홍계(唐洪系)와 토홍계(土洪系)라는 서로 다른 두 계통이 있습니다. 당홍계는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洪殷悅)을, 토홍계는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삼습니다. 오늘날 남양 홍씨의 대다수는 당홍계입니다.
당홍계의 족보는 그 연원을 당나라 8학사의 한 사람이라는 홍천하(洪天河)에게서 찾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홍천하는 고구려 영류왕 때 건너와 유학을 가르쳤고, 연개소문의 난 때 신라로 피신해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의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태조를 도운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를 지낸 홍은열을 1세조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습니다. 정사에는 홍은열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아, 고려 개국공신 홍유(洪儒)와 같은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본관 남양은 고구려의 당성현(唐城縣)에서 비롯해 신라 때 당은군, 고려 때 당성군이 되었습니다. 1290년 익주목으로 높아졌다가 1310년 남양부가 되었고, 1413년(태종 13) 남양도호부가 되었습니다. 이후 1914년 수원군, 1949년 화성군에 속했고, 지금은 화성시 남양읍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양도호부의 토성(土姓) 가운데 첫머리에 홍씨가 실려 있습니다.
당홍계는 일찍이 3세 홍란의 재신공파, 4세 홍복의 예사공파, 6세 홍후의 중랑장파가 갈라졌습니다. 이어 7세 홍지유의 후손이 13세에서 13파로 나뉘어 모두 16파를 이룹니다. 13파 가운데 남양부원군 홍규의 손자 대에서 갈라진 홍주의 남양군파, 홍언박의 문정공파, 홍언수의 판중추공파가 크게 번성했습니다. 홍운수의 익산군파도 큰 파입니다. 남양군파와 문정공파가 당홍계 인구의 약 70%, 익산군파가 약 1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고려 후기에 홍규는 1270년 왕명을 받아 권신 임유무를 제거하고 정권을 왕실에 돌려주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 딸은 충숙왕의 비 공원왕후(명덕태후)가 되어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았습니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오른 홍언박은 공원왕후의 조카입니다. 이로써 남양 홍씨는 고려 말 최고의 권문으로 떠올랐습니다.
조선에 들어와 당홍계는 문과 급제자 293명, 상신 8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왕비 1명, 부마 4명을 냈습니다. 홍주의 증손 홍일동은 1454년 처음으로 『남양홍씨세보』를 엮었는데, 원본은 전하지 않고 서문만 뒷날의 족보에 남아 있습니다. 성종 때 좌의정 홍응, 인조 때 영의정 홍서봉, 현종 때 영의정 홍명하 등 재상이 여럿 나왔고,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도 당홍계 출신입니다. 한편 토홍계에서는 홍언필과 그 아들 홍섬 부자가 차례로 영의정에 올랐고, 조선 후기에는 토홍계의 실학자 담헌 홍대용이 『의산문답』 등에서 지구 자전설을 펼쳤습니다. 개항기에는 홍영식이 우정총국을 세우고 갑신정변에 가담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봉오동 전투의 지휘관 홍범도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습니다.
계파와 세계(世系)는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족보로 확인하세요.
남양군파, 문정공파, 판중추공파, 익산군파, 예사공파, 중랑장파, 재신공파, 토홍계 문희공파, 토홍계 정효공파, 토홍계 참의공파, 토홍계 대호군공파
남양군파는 남양부원군 홍규의 손자이자 삼사사 홍융의 맏아들인 홍주(洪澍)를 파조로 하는, 당홍계에서 가장 큰 파입니다. 홍주는 문정공파 파조 홍언박의 형으로, 당홍계 13세에 해당합니다. 남양군파는 문정공파와 함께 당홍계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주의 증손 홍일동(洪逸童)은 1442년(세종 24) 문과에 급제해 호조참판을 지냈고, 1454년 최초의 『남양홍씨세보』를 편찬했습니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서문만 뒷날의 족보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홍춘경(洪春卿, 1497~1548)의 자손에서 상신 5명과 문형 2명이 나왔으며, 그의 세 아들에게서 율정공파·연기공파·졸옹공파가 갈라졌다고 합니다. 홍춘경의 손자 홍서봉(洪瑞鳳)은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공신이 되고 병자호란 무렵 정승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증손 홍명하(洪命夏)는 현종 때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영조 때 영의정 홍치중(洪致中), 고종 때 영의정 홍순목(洪淳穆)도 이 계통으로 꼽힙니다.
문정공파는 공민왕 때 문하시중으로 수상을 지낸 홍언박(洪彦博, 1309~1363)을 파조로 합니다. 파 이름은 그의 시호 문정(文正)에서 왔습니다. 홍언박은 남양부원군 홍규의 손자이자 삼사사 홍융의 둘째 아들로, 남양군파 파조 홍주의 아우이며 판중추공파 파조 홍언수의 형입니다. 고려의 명필 홍관의 7세손이고, 공민왕의 어머니 공원왕후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홍언박은 1353년 이제현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이색 등을 뽑았고,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왕을 모셨으며, 1363년 흥왕사의 난 때 피하지 않고 맞서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남양군파와 함께 당홍계에서 가장 번창한 파로 꼽히며, 두 파가 당홍계 인구의 약 7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홍언박의 아들 홍사보(洪師普)는 판각문사, 홍사범(洪師範)은 지밀직사사, 홍사우(洪師禹)는 도순문사, 홍사원(洪師援)은 전서를 지냈습니다. 경상북도 군위의 양천서원은 1786년(정조 10) 홍언박을 모시려고 세운 문중 서원으로, 1868년 헐렸다가 1988년 다시 세워졌습니다.
판중추공파는 홍언수(洪彦修)를 파조로 합니다. 홍언수는 남양부원군 홍규의 손자이자 삼사사 홍융(洪戎)의 아들로, 남양군파 파조 홍주와 문정공파 파조 홍언박의 아우입니다. 어머니는 지밀직사사 나유(羅裕)의 딸이며, 검교참찬문하부사를 지낸 것으로 전합니다.
홍언수 형제가 자란 고려 후기는 할아버지 홍규가 1270년 임유무를 제거해 무신정권을 끝내고, 고모 공원왕후가 충숙왕의 비가 되어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으면서 남양 홍씨가 최고의 권문으로 떠오른 때였습니다. 형 홍언박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올랐습니다.
판중추공파는 7세 홍지유의 후손이 13세손 대에서 13파로 갈라질 때 생긴 파 가운데 하나로, 같은 형제 대에서 나온 남양군파·문정공파와 함께 홍규의 후손 계열을 이룹니다. 남양군파·문정공파·익산군파 등과 함께 후손이 많은 파로 꼽힙니다. 파의 세계와 인물은 파보에 따라 차이가 있으니 집안 족보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익산군파는 홍운수(洪云遂)를 파조로 하는 당홍계의 파로, 7세 홍지유의 후손이 13세에서 13파로 나뉠 때 생겼습니다. 당홍계 인구의 약 15%를 차지해 남양군파·문정공파 다음으로 큰 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 이 파에서 이름난 재상이 나왔습니다. 익산군파 17세손 홍응(洪應, 1428~1492)은 1451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승정원과 육조의 요직을 거쳐 1479년(성종 10) 우의정, 1485년 좌의정에 올랐고, 익성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그의 누이는 문종의 후궁 숙빈 홍씨이고, 아들 홍상은 덕종의 맏딸 명숙공주와 혼인해 당양위가 되었습니다.
홍응의 아우 홍흥(洪興)은 연산군 때 강원도 관찰사와 호조참판을 지냈습니다. 홍응을 모신 휴휴당 부조묘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성종실록』의 졸기는 홍응에게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는 평을 남겼습니다.
예사공파는 1세조 홍은열의 증손인 4세 홍복(洪復)을 파조로 합니다. 당홍계는 3세 홍란의 재신공파, 4세 홍복의 예사공파, 6세 홍후의 중랑장파가 일찍 갈라지고, 7세 홍지유의 후손이 13세에서 13파로 나뉘어 모두 16파를 이룹니다. 예사공파는 13파가 갈라지기 훨씬 앞서 분파된 초기의 파입니다.
예사공파 후손이 정리한 글에 따르면, 이 파에서는 고려 후기에 홍한승·홍충이 추밀원부사를, 홍세가 도첨의정승을 지냈고, 고려 말의 홍유도는 밀직사 벼슬을 지냈다고 합니다. 또 홍명은 고려의 재신으로 있다가 조선 조정에 들어가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기록은 파보와 문중 자료에 근거한 것이어서, 정사와 함께 견주어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사공파는 남양 홍씨 가운데 비교적 일찍 갈라진 만큼 세계(世系)가 다른 파와 따로 전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자세한 계보는 예사공파 파보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랑장파는 홍은열의 6세손 홍후(洪厚)를 파조로 하며, 중랑공파라고도 부릅니다. 파 이름의 '중랑장(中郞將)'은 고려 시대 중앙군인 2군 6위에 둔 정5품 무관 벼슬 이름입니다.
당홍계는 3세 홍란의 재신공파와 4세 홍복의 예사공파가 먼저 갈라지고, 이어 6세 홍후의 중랑장파가 갈라졌습니다. 그 뒤 홍후와 같은 대를 이은 7세 홍지유의 후손이 13세손 대에서 남양군파·문정공파·판중추공파·익산군파 등 13파로 나뉘어, 당홍계는 모두 16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중랑장파는 13파보다 앞서 독립한 세 초기 파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홍계에서 후손이 많은 파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중랑장파 후손도 당홍계 대동항렬을 함께 쓰는데, 당홍계는 홍은열을 1세로 하여 27세 계(啓), 28세 영(泳), 29세 병(秉), 30세 섭(燮), 31세 재(在), 32세 종(鍾), 33세 순(淳) 등으로 항렬자를 정해 두었습니다. 고려 초기의 세계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집안 족보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신공파는 홍은열의 손자인 3세 홍란(洪蘭)을 파조로 하는, 당홍계에서 가장 먼저 갈라진 파입니다. 파 이름의 '재신(宰臣)'은 재상의 반열에 오른 신하를 뜻합니다.
고려에서는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신을 아울러 재추(宰樞)라 불렀는데, 재신은 그 가운데 국정을 논의하던 재상급 관원을 가리킵니다.
당홍계는 재신공파에 이어 4세 홍복의 예사공파, 6세 홍후의 중랑장파가 갈라졌고, 7세 홍지유의 후손이 13세에서 13파로 나뉘어 모두 16파를 이룹니다. 재신공파는 1세조의 바로 손자 대에서 나온 만큼 당홍계에서 가장 오래된 갈래입니다.
세계일보 연재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에 따르면, 부계 홍씨는 문하시중을 지낸 홍은열의 손자 홍난(洪蘭)을 선조로 하며, 근래에는 남양 홍씨(당홍계)와 족보를 합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처럼 일찍 갈라진 갈래가 다른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 오다가 다시 합쳐진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세계는 집안 족보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희공파는 당홍계와 계통이 다른 남양 홍씨 토홍계(土洪系)의 파로, 중종·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12세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을 파조로 합니다. 파 이름은 그의 시호 문희(文僖)에서 왔습니다. 토홍계는 고려 고종 때 금오위 별장을 지낸 당성의 토착 사족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며, 9세 홍익생의 아들 대부터 10~12세에서 문희공파·정효공파·참의공파·주부공파·대호군공파의 5파로 나뉩니다.
홍언필은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고 1544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아들 홍섬(洪暹)은 선조 때 세 차례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습니다. 홍언필의 부인 여산 송씨는 아버지 송질·남편·아들이 모두 영의정을 지낸 드문 경우로 꼽힙니다. 홍섬의 딸 남양군부인은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원군과 혼인했습니다.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에는 홍언필의 묘와 아버지 홍형 등 토홍계 선대의 묘와 신도비가 모여 있어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남양의 안곡사는 홍섬을 제향했던 사당입니다.
정효공파는 남양 홍씨 토홍계의 파로, 홍언필의 아우 홍언광(洪彦光)을 파조로 합니다. 홍언필·홍언광 형제는 11세 홍형(洪泂)의 아들로, 형은 문희공파, 아우는 정효공파의 파조가 되었습니다.
홍언광의 아들 홍담(洪曇)은 선조 때 이조판서와 우참찬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뽑혔으며, 효자로 정문이 세워졌습니다. 홍담의 손자 홍희(洪憙)는 인조의 어머니 쪽 이모부로서 익평부원군에 추봉되었고, 홍희의 아들 홍진도(洪振道)는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습니다. 후손 홍억(洪檍)은 정조 때 6조의 판서를 모두 지냈다고 합니다.
홍억의 조카인 실학자 담헌 홍대용(洪大容)이 이 파 출신입니다. 홍대용은 1765년 숙부 홍억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따라가 북경에서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고 서양 천문학을 접했으며, 『의산문답』에서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을 펼쳤습니다. 그가 태어난 천안 수신면에는 오늘날 홍대용과학관이 있습니다.
참의공파는 남양 홍씨 토홍계의 파로, 11세 홍한(洪瀚)을 파조로 합니다. 홍한은 10세 홍귀해(洪貴海)의 아들로 홍언필의 아버지 홍형과 형제간이며, 이조참의를 지내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다고 합니다. 파 이름은 그의 벼슬 참의(參議)에서 왔습니다. 화성 홍법리의 토홍계 묘역에도 홍한의 묘가 있습니다.
홍한의 증손 홍가신(洪可臣)은 수원부사·개성유수 등을 지냈고, 1596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광해군 때 형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홍가신의 손자 홍우정·홍우량·홍우원 형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홍우정은 병자호란 뒤 은둔해 절개를 지켰고, 홍우량은 청백리에 뽑혔으며, 홍우원(洪宇遠)은 숙종 때 남인의 지도자로 공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습니다. 홍우원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근대 인물로는 일본군 중장을 지낸 홍사익이 홍우원의 후손으로 이 계통에 속합니다.
대호군공파는 남양 홍씨 토홍계의 파로, 10세 홍귀연(洪貴演)을 파조로 합니다. 홍귀연은 9세 홍익생의 아들로, 문희공파·정효공파·참의공파의 선조인 홍귀해, 주부공파 파조 홍귀호와 형제간입니다. 파 이름의 대호군(大護軍)은 조선 초 오위에 둔 종3품 무관 벼슬 이름입니다.
홍귀연의 아들 홍숙(洪淑)은 중종 때 대사헌과 형조·예조·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습니다.
홍숙의 현손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입니다. 화의가 이루어진 뒤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 굽히지 않다가 죽임을 당했고,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가 내려졌습니다. 그는 광주 헌절사, 강화 충렬사, 평택 포의사 등 여러 사당과 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이 밖에 홍산 창렬서원, 부안 도동서원, 영천 장암서원에도 모셔졌습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홍은열(남양 홍씨 당홍계 시조), 홍관(고려 문신·서예가), 홍규(남양부원군·임유무 제거), 공원왕후(충숙왕비·공민왕의 어머니), 홍언박(공민왕 때 문하시중·문정공파 파조), 홍일동(최초의 남양홍씨세보 편찬), 홍응(성종 때 좌의정·익산군파), 홍언필(조선 영의정·토홍계 문희공파 파조), 홍섬(조선 영의정·홍언필의 아들), 홍명하(현종 때 영의정), 홍대용(실학자·의산문답 저자), 효정왕후(헌종의 계비), 홍영식(우정총국 총판·갑신정변), 홍범도(봉오동 전투 지휘관)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공공데이터)를 참고한 남양 홍씨 계열 독립유공자입니다. 이름을 누르면 공적을 볼 수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결정 명단·《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등에 오른 남양 홍씨 계열 인물입니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는 경기 화성 남양을 본관으로 하며, 당(唐)에서 왔다는 당홍계(唐洪系)와 본래 토착이라는 토홍계(土洪系)로 나뉩니다. 오늘날 남양 홍씨의 대다수는 당홍계로,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洪殷悅)을 중시조로 삼습니다.
남양 홍씨는 조선시대 많은 문신을 배출한 명문으로 대제학과 정승을 여럿 냈습니다. 실학자 담헌 홍대용 등 학자도 이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남양 홍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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