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 흥선대원군의 처남, 병조판서, 시호 충정
| 생몰 | 1830 ~ 1874 |
| 시대 | 조선 말기 |
| 본관 | 여흥 민씨 |
민승호(閔升鎬, 1830~1874)는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복경(復卿), 시호는 충정(忠正)입니다. 돈령부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민치구와 전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누이 여흥부대부인이 흥선대원군과 혼인해 고종의 외삼촌이 되었습니다. 11촌 아저씨뻘인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되어 민유중의 봉사손이 되었고, 이 때문에 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가 되었습니다.
1861년 음서로 관직에 올랐고, 1863년 누이의 아들 고종이 즉위하자 1864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곧 홍문관 교리·응교·전한을 거쳐 규장각 직각, 가례도감 부제조로 파격 승진했습니다. 1866년 양누이동생이 왕비로 책봉되자 이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판, 이후 형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습니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 국교를 요청했을 때 흥선대원군이 반대하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고 전합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직후 민씨 일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해 음력 11월 28일 신원을 알 수 없는 승려가 선물이라며 가져온 상자를 열다가 폭약이 터져 아들, 양어머니 감고당 한산 이씨와 함께 숨졌습니다. 죽기 전 운현궁을 가리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대원군을 배후로 의심하는 설이 있으나 확정된 증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고종은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후사가 없어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이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누이 여흥부대부인을 통해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었고, 양아버지 민치록을 통해 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중의 인연이 그를 정권의 중심으로 이끌었습니다.
범인과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이후 양자로 들어간 민영익이 척족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묘소 위치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후사가 없어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이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1874년 정체불명의 승려가 가져온 상자가 폭발하여 아들과 양어머니와 함께 숨졌으나, 배후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