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심씨(靑松 沈氏) — 청송을 본관으로 하는 심씨의 대표 계열로 전해집니다.

청송을 본관으로 하는 심씨의 대표 계열로 전해집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청송 심씨 인구는 약 240,768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심씨라도 본관(청송)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청송 심씨(靑松 沈氏)는 경상북도 청송군을 본관으로 하는 심씨의 대표 본관입니다. 시조 심홍부(沈洪孚)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인물로 전하며, 그 후손이 대대로 청송에 터를 잡으면서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시조의 묘소는 청송읍 보광산 자락에 있다고 전하며, 조선 시대 지리지 『여지도서』에는 그 아래의 보광사가 심홍부의 무덤을 지키는 사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조 위의 계보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종회 자료에 따르면 『원류보』 등 일부 가첩에는 고려 때 중윤을 지낸 심충(沈忠)에서 공좌(公佐)·수정(守貞)을 거쳐 심홍부에 이르는 3대가 적혀 있으나, 1545년 처음 족보를 만들 때 이를 확인할 수 없어 문림랑 심홍부를 시조로 삼았다고 합니다. 심홍부의 맏아들 심연(沈淵)은 합문지후를 지내 심용·심덕부로 이어졌고, 둘째 아들 봉익대부 심성(沈晟)의 후손은 지금의 북한 지역에 대대로 살았다고 전합니다. 본관인 청송은 1419년(세종 1) 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청보군으로 승격되었고, 뒤에 송생현과 합쳐 청송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전합니다.
가문이 크게 일어난 것은 4세 심덕부(沈德符, 1328~1401) 때입니다. 전리정랑 심용(沈龍)의 아들인 그는 고려 우왕 때 서해도원수 등으로 왜구 토벌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1380년에는 도원수 나세와 함께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388년 요동 출병 때 서경도원수로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왔고, 조선 개국 후 회군공신 1등에 추록되어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뒤에 좌정승에 올랐습니다. 반면 아우 악은 심원부(沈元符)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새 왕조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심덕부의 일곱 아들에서 서울에 살며 벼슬을 이어 간 경파(京派) 7파 — 도총제공파·판사공파·지성주사공파·인수부윤공파·안효공파·청원군파·동지총공파 — 가 갈라졌고, 심원부의 후손은 고향에 머문 향파(鄕派)를 이루었습니다. 경파 가운데서도 세종의 장인 심온을 파조로 하는 안효공파와 인수부윤공파가 특히 번성했습니다.
청송 심씨는 조선 왕실과 거듭 혼인한 대표적 외척 가문입니다. 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의 세 왕비를 배출했고, 태조의 딸 경선공주와 혼인한 심종, 세종의 딸 정안옹주와 혼인한 심안의,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혼인한 심익현 등 여러 부마가 나왔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명종 때 심의겸이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서 분당의 한 축을 이루었고, 조선 후기에는 심환지가 노론 벽파를 이끌었습니다. 세조 때 영의정 심회부터 명종 때 심연원, 인조 때 심열, 효종 때 심지원, 고종 때 심순택에 이르기까지 정승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2002년 대종회가 시조 묘 앞에 세운 사적비는 이 가문이 13명의 정승(그 가운데 영의정 9명), 2명의 대제학, 3명의 왕비, 4명의 부마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족보 편찬도 이른 편입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심통원이 순천에서 간행한 을사보(乙巳譜)를 시작으로, 1562년 임술보, 1578년 심의겸이 중심이 된 무인보, 1649년 영천군수 심장세가 펴낸 기축보로 이어졌다고 기록됩니다. 다만 일부는 실제 간행 여부를 두고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찬경루(讚慶樓) — 청송읍 용전천가의 자연 암반 위에 선 누각으로, 시조 심홍부의 재각(齋閣)으로 1428년(세종 10)에 처음 지어졌습니다. 화재로 소실된 뒤 1792년(정조 16)에 다시 세워졌으며,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보광사와 추모재·만세루 — 청송읍 보광사는 시조 묘소를 지키던 사찰로, 소헌왕후가 조상의 묘가 이 산에 있다 하여 원당으로 삼고 재실 추모재와 만세루를 세웠다고 전합니다. 극락전은 1615년경 지어진 건물로 2014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600년 넘은 누각으로 알려진 만세루는 2025년 3월 경북 대형 산불 때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심온 묘와 안효사 —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에 있으며 1979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묘역에는 홍살문·재실·신도비와 사당 안효사(安孝祠)가 있고, 묘비 글씨는 안평대군의 것으로 전합니다.
청송 송소고택 —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영조 때 만석의 재산을 일군 심처대의 7대손 심호택이 1880년경 지은 집입니다. 이 밖에 심연원 신도비(김포 통진읍), 심대 장군 묘(용인 처인구 남사면)가 전합니다.
집성촌으로는 청송군 부남면·파천면, 강원 인제군 남면, 경기 파주·화성, 경남 산청·합천, 전남 곡성·장성, 전북 군산 나포면, 충북 괴산 불정면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계파와 세계(世系)는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족보로 확인하세요.
안효공파, 인수부윤공파, 청원군파, 도총제공파, 판사공파, 지성주사공파, 동지총공파, 악은공파
안효공파는 청성백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로 세종의 장인인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 1375~1418)을 파조로 합니다. 심온은 세종 즉위와 함께 영의정·청천부원군에 올랐으나 1418년 옥사로 사사되었다가 문종 때 신원되어 안효라는 시호를 받았고, 딸은 세종비 소헌왕후입니다. 경파 7파 가운데 가장 번성하여 청송 심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심온의 묘와 사당 안효사는 수원시 영통구에 있습니다.
심온의 아들 심회가 세조 때 영의정에 올라 3대 수상의 가문을 이루었고, 그 증손 심연원·심통원 형제가 명종 때 정승을 지냈습니다. 심연원의 손녀가 명종비 인순왕후이고, 손자 심의겸은 서인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이 밖에 좌의정 심희수, 임진왜란 때 순절한 심대, 인조 때 영의정 심열, 경종비 단의왕후,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 순조 때의 재상 심상규, 고종 때 영의정 심순택, 소설가 심훈 등이 이 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심희수의 할아버지 심봉원(호 효창)을 파조로 하는 효창공파, 심대의 후손인 충장공파처럼 안효공파 안에서 다시 갈라진 지파도 있습니다.
인수부윤공파는 심덕부의 넷째 아들 심징(沈澄, ?~1432)을 파조로 합니다. 심징은 태조 때 대장군을 지냈고 인수부윤을 거쳐 1418년 경창부윤에 이르렀으나, 그해 아우 심온의 옥사에 연좌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동래로 옮겨졌으며, 아들 심석준도 낙안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뒤에 풀려나 143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효공파와 함께 경파 가운데 특히 번성하여 높은 벼슬을 많이 낸 파로 꼽힙니다.
심징의 손자 심선(沈璿)은 세조 때 경기도·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같은 집안의 심안의(沈安義)는 세종의 딸 정안옹주와 혼인한 부마 청성위입니다. 명종 때 형조판서 심광언, 효종 때 영의정 심지원,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혼인한 청평도위 심익현(沈益顯), 조선 후기의 화가 심사정 등이 이 파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원의 묘와 신도비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청원군파는 심덕부의 여섯째 아들 심종(沈悰, ?~1418)을 파조로 합니다. 심종은 1393년(태조 2) 태조의 둘째 딸 경선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고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으며, 1398년 왕자·종친·부마의 작호를 정비할 때 청원후로 고쳐 봉해졌다가 다시 청원군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중립을 지켜 무사했습니다.
1408년(태종 8) 경상도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1416년 전주에 유배 중이던 회안군 이방간과 은밀히 통하며 선물을 받은 일이 드러나 공신 녹권을 빼앗기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토산에 안치되었고, 1418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딸은 덕수 이씨 이명신에게 출가한 것으로 전합니다. 청송 심씨가 조선 왕실과 처음 혼인을 맺은 부마 가계라는 점에서 가문사에서 의미가 큰 파입니다.
도총제공파는 심덕부의 맏아들 심인봉(沈仁鳳)을 파조로 합니다. 2002년 청송심씨대종회가 시조 묘 앞에 세운 사적비문에 따르면 심덕부의 일곱 아들 가운데 맏이인 심인봉은 도총제(都摠制)를 지냈으며, 파 이름도 이 벼슬에서 왔습니다. 족보 자료를 정리한 위키백과에는 그가 의흥삼군부 도총제를 지냈고, 동지밀직사사 신아의 딸 동양군부인 신씨와 혼인했으며, 아들 심호(沈灝)가 평산부사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대종회 사적비문은 일곱 아들을 도총제 인봉, 판사 의구, 지성주사 계년, 인수부윤 징, 영의정 온, 청원군 종, 동지총제 정의 차례로 적고 있습니다.
도총제공파는 판사공파·지성주사공파·인수부윤공파·안효공파·청원군파·동지총공파와 함께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갈라진 경파(京派) 7파의 하나로, 조선 개국 뒤 서울에 살며 벼슬을 이어 간 경파의 맏집에 해당합니다. 다른 경파에 비해 공개된 인물 기록은 많지 않으므로, 세계와 인물은 각 문중의 족보와 파종회 자료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공파는 심덕부의 둘째 아들 심의구(沈義龜)를 파조로 합니다. 청송심씨대종회의 사적비문은 그를 둘째 아들로 '판사(判事)'를 지냈다고 적고 있으며, 파 이름도 이 벼슬에서 왔습니다. 이름의 '龜' 자를 '귀'로 읽어 심의귀로 적은 자료도 있습니다. 족보 자료를 정리한 위키백과에는 그가 판서 김남일의 딸 상주 김씨와 혼인했고, 아들 심구(沈溝)가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사위로 함양 여씨 여계(呂稽)가 있다고 전합니다. 대종회 사적비문은 일곱 아들을 도총제 인봉, 판사 의구, 지성주사 계년, 인수부윤 징, 영의정 온, 청원군 종, 동지총제 정의 차례로 적고 있습니다.
도총제공파·지성주사공파·인수부윤공파·안효공파·청원군파·동지총공파와 함께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갈라진 경파 7파의 하나입니다. 경파는 개국공신 심덕부의 뒤를 이어 서울에 살며 대대로 벼슬을 이어 갔는데, 판사공파의 자세한 세계와 인물은 각 문중의 족보와 파종회 자료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성주사공파는 심덕부의 셋째 아들 심계년(沈繼年)을 파조로 합니다. 청송심씨대종회의 사적비문에 따르면 그는 지성주사(知成州事), 곧 성주(成州)의 수령을 지냈으며, 파 이름도 이 벼슬에서 왔습니다. 자료에 따라 심도생(沈道生)이라는 이름으로도 전하고, 파 이름을 '성주지사공파'로 적기도 합니다.
족보 자료를 정리한 위키백과에는 그가 강진 최씨와 혼인했고, 아들 심연(沈涓)이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또 다른 아들 심기(沈沂)가 성균관 학유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대종회 사적비문은 일곱 아들을 도총제 인봉, 판사 의구, 지성주사 계년, 인수부윤 징, 영의정 온, 청원군 종, 동지총제 정의 차례로 적고 있습니다. 도총제공파·판사공파·인수부윤공파·안효공파·청원군파·동지총공파와 함께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갈라진 경파 7파의 셋째 집으로, 조선 개국 뒤 서울에 살며 벼슬을 이어 간 경파의 한 갈래입니다. 세계와 인물은 각 문중의 족보와 파종회 자료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동지총공파는 심덕부의 일곱째이자 막내아들 심정(沈泟, ?~1418)을 파조로 합니다. 심정은 의흥삼군부의 동지총제(同知摠制)를 지냈으며, 파 이름도 이 벼슬에서 왔습니다. 공양왕의 형제인 정양부원군 왕우(王瑀)의 딸과 혼인했다고 전하는데, 태조의 아들 무안대군 방번도 왕우의 사위였으므로 심덕부 집안과 태조 집안은 겹사돈이 되었다고 합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한 뒤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 등과 함께 상왕 태종이 병권을 쥐고 있는 것을 비난했다는 일이 드러나 옥사가 일어났고, 심정은 목숨을 잃었으며 사은사로 명에 가 있던 형 심온도 이 일로 사사되었습니다. 대종회 자료에는 심정이 병조참판 강상인에게 내금위 군사의 결원을 왜 채우지 않느냐고 물은 말이 상왕에게 전해진 것이 발단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족보 자료에 따르면 그의 손자 심말동은 첨정을 지냈고, 증손녀가 성종의 후궁 숙용 심씨입니다.
악은공파는 심덕부의 아우 악은(岳隱) 심원부(沈元符)를 파조로 하는 향파(鄕派)입니다. 심원부는 익재 이제현의 문인으로 고려 말 전리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전합니다. 조선 건국 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자손들에게도 새 왕조에 벼슬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합니다. 후손들은 이를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고향에 살며 벼슬을 멀리했다고 전합니다.
세 아들 가운데 맏아들 심천윤(영동정)과 둘째 심천주(현령)에게서 각각 영동정공파·현령공파가 이어졌고, 셋째 심천식은 정몽주의 문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계통에서 영조 무렵 만석의 재산을 일군 심처대와 그 7대손으로 청송 송소고택을 지은 심호택, 임진왜란 때 곽재우 휘하에서 싸운 의병장 심기일·심대승, 1896년 을미의병 때 청송의진의 의병대장을 맡은 심성지 등이 나왔다고 전합니다. 심원부는 두문동서원과 전남 장성의 경현사에 배향되었다고 합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심덕부(조선 좌정승·청성백), 심온(세종의 장인·영의정), 소헌왕후(세종비), 심회(세조 때 영의정), 심연원(명종 때 영의정), 인순왕후(명종비), 심통원(명종 때 좌의정), 심의겸(서인의 영수), 심대(임진왜란 순절 경기도관찰사), 심희수(좌의정·청백리), 심지원(효종 때 영의정), 단의왕후(경종비), 심사정(조선 후기 화가), 심환지(노론 벽파 영수·영의정), 심상규(순조 때 재상·대제학), 심훈(소설가·『상록수』)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심홍부 → 심덕부의 일곱 아들 → 소헌·인순·단의왕후다른 파·문중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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