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조씨 족보·가계도

우리집안 온라인 족보 만들기

한양 조씨(漢陽 趙氏) — 한양 조씨는 고려 첨의중서사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삼는 본관으로, 쌍성 수복과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조돈·조인벽·조인옥·조온 일가와 개혁 정치가 정암 조광조를 배출했습니다.

인구 — 약 332,580명 (2015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한양 조씨란

한양 조씨는 고려 첨의중서사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삼는 본관으로, 쌍성 수복과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조돈·조인벽·조인옥·조온 일가와 개혁 정치가 정암 조광조를 배출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한양 조씨 인구는 약 332,580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조씨라도 본관(한양)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한양 조씨의 뿌리와 역사

시조와 본관의 유래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고려 때 조순대부(朝順大夫)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는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모십니다. 족보와 문중 자료는 조지수가 덕원부 용진현(龍津縣,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원산 일대)에 대대로 살아온 토착 사족의 후예라고 전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중국에서 귀화해 용진에 살았다고 적고 있어,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설명이 다릅니다. 양주 조씨 세보에는 송나라 태조의 후손 조익(趙翼)의 네 아들이 고려에 건너와 각각 배천·한양·풍양·양주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이 실려 있지만, 한양 조씨와 풍양 조씨 쪽에서는 이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관 한양은 백제의 한산(漢山)에서 비롯되어,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한양군(漢陽郡)이 되었습니다. 고려 때 양주(楊州)·남경(南京)을 거쳐 1308년 한양부(漢陽府)로 불렸고, 조선 태조가 도읍을 옮긴 뒤 한성부(漢城府)가 되었습니다. 이 집안이 함경도에서 일어났으면서도 한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후손들이 한성으로 옮겨 살며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됩니다.

쌍성총관부와 고려 말의 가문

시조의 아들 조휘(趙暉)는 1258년(고종 45) 몽골군이 동북면에 쳐들어오자 정주 사람 탁청(卓靑)과 함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 등을 죽이고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골에 투항했습니다. 몽골은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고 조휘를 총관으로 삼았습니다. 『고려사』는 그를 반역 열전에 실었습니다. 총관 자리는 아들 조양기(趙良琪), 손자 조림(趙琳), 증손 조소생(趙小生)까지 4대 99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조양기의 딸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후처가 되었고, 이것이 한양 조씨와 이성계 집안이 맺은 첫 인연입니다.

집안의 방향을 바꾼 사람은 조양기의 아들 조돈(趙暾)입니다. 그는 일찍 고려에 귀부해 충숙왕을 섬겼고,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쌍성 수복에 나서자 아들 조인벽을 보내 쌍성 사람들을 달래는 등 고려군을 도왔습니다. 이때 쌍성총관이던 조카 조소생은 끝까지 맞서다 여진 땅으로 달아났고, 1362년 나하추를 끌어들여 고려를 침공했다가 그해 죽었습니다. 조돈은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1등공신에 오르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습니다.

조선 왕실과의 인연과 개국공신

조돈의 맏아들 조인벽(趙仁璧)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딸인 정화공주(貞和公主)와 혼인해 태조의 매부가 되었고,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운 뒤 조선 개국 후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그 아우 조인옥(趙仁沃)은 위화도 회군을 건의하고 개국공신 1등에 올라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조인벽의 맏아들 조온(趙溫)은 개국공신 2등·정사공신 2등·좌명공신 4등에 올랐고, 정화공주가 낳은 아들 조연(趙涓)은 좌명공신 4등으로 세종 때 우의정을 지냈습니다. 또 시조 조지수의 고손으로 기록되는 조영무(趙英茂)는 개국공신 3등·정사공신 1등·좌명공신 1등에 올라 우정승을 지내고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한 연재 기사는 조선 개국공신 40여 명 가운데 조씨가 8명이었다고 소개합니다. 다만 조영무 계열은 조지수의 다른 아들 조인재(趙麟才)의 후손이라고 전하며, 이 계통을 같은 종가로 인정하는지를 두고 문중 안에 지금도 이견이 있습니다.

왕실과의 혼인도 이어졌습니다.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가 이 가문 출신이고, 중종의 서녀 효정옹주는 조의정에게 출가했습니다. 정종의 서자 장천군, 태종의 서자 후령군 등 여러 왕족과도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사화와 사림의 시대

번성하던 가문은 15~16세기의 정변과 사화로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조영무의 손자 조완규(趙完珪)·조완주(趙完珠) 형제를 비롯해 한 집안에서 여섯 명이 화를 입었고, 조인옥의 손자 조순생(趙順生) 집안도 화를 당했습니다. 조온의 손자 조충손(趙衷孫)은 안평대군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변방에 안치되었다가 예종 때 풀려났습니다. 그 아들 조원기(趙元紀)는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 하자 거부해 파직되었고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에 오르고 청백리에 뽑혔습니다. 조원기의 조카 정암 조광조(趙光祖)는 중종 때 현량과 실시, 소격서 혁파, 향약 보급, 위훈 삭제를 이끌다가 1519년 기묘사화로 사사되었습니다. 그는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어, 한양 조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됩니다.

조선 중·후기와 족보 편찬

한양 조씨 최초의 족보는 조충손이 만들던 작은 보첩을 바탕으로 조원기가 엮고 족질 조세정이 함창에서 목판으로 펴낸 1524년의 갑신보(가정보)입니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서문과 발문만 후대 족보에 실려 있습니다. 이어 1651년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신묘보를 펴냈고, 1726년 병오보, 1798년 무오보, 1849년 기유보, 1884년 조제화(趙濟華)의 갑신보, 1934년 갑술보가 뒤를 이었습니다. 조경은 1626년 정시문과에 장원하고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으며, 대제학과 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조웅(趙熊)·조경남(趙慶男)이 활약했고, 경기도 양평 도곡리의 이른바 능말 한양 조씨 가문에서는 위성공신에 오른 조공근의 공신 초상화가 전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여항시인 추재 조수삼(趙秀三)이 이름을 떨쳤고, 개항기의 조제화는 대사헌·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김해 숭선전 비석의 글씨를 썼습니다.

근현대의 인물

근현대에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유석 조병옥(趙炳玉)과 그의 아들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윤형(趙尹衡),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지낸 조순형(趙舜衡)이 있습니다.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과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趙世衡), 국방부 장관 조성태(趙成台), 통일부 장관 조명균(趙明均)도 이 본관입니다. 문학에서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과 『공존의 이유』의 시인 편운 조병화(趙炳華)가 대표적이고, 학계에서는 『한국문학통사』의 국문학자 조동일(趙東一), 독립운동사 연구를 이끈 역사학자 조동걸(趙東杰)이 이름을 남겼습니다. 조지훈의 셋째 아들 조태열(趙兌烈)은 외교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세거지와 인구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한양 조씨는 1985년 273,408명, 2000년 95,206가구 307,746명, 2015년 332,580명으로 집계되어 조(趙)씨 본관 가운데 가장 많습니다. 대표적인 집성촌으로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양평군 양평읍 도곡리,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삼봉리,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해남군 화산면, 전북 남원시 주생면,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등이 꼽힙니다. 북한 지역에서는 함경남도 북청군 덕성면 일대가 알려져 있습니다.

영양 주실마을(주곡리)은 기묘사화 뒤 한양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조운종(趙云從)의 증손 조원(趙源)이 영양 원당(지금의 상원리)에 정착한 데서 비롯합니다. 그 손자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1629~1630년 무렵 주실에 터를 잡은 뒤 380여 년 동안 세거해 왔습니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경상북도 기념물), 옥천 조덕린의 옥천종택, 1773년 세운 월록서당이 남아 있습니다. 집안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의 의병에 참여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항렬

한양 조씨는 시조를 1세로 하는 대동항렬을 씁니다. 22세 종(鍾)·재(載), 23세 □원(元)·□윤(允), 24세 병(炳·昺), 25세 □행(行)·□형(衡), 26세 성(誠·成), 27세 □희(熙)·□기(紀), 28세 경(慶)·용(庸), 29세 □신(新)·□장(章), 30세 정(廷)·성(聖)으로 이어집니다. 24세 항렬인 조병옥·조병화와 25세 항렬인 조윤형·조순형·조세형의 이름에서 이 질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양 주실마을의 병참공파 후손들은 22세 병(秉), 23세 □용(容)·영(榮), 27세 동(東) 등 별도의 항렬을 써 왔는데, 조동탁(조지훈)·조동일·조동걸의 ‘동’이 그 예입니다.

유적과 재실

시조 조지수의 묘소는 함경남도 영흥에 있다고 전해져 제향이 어려우므로, 종중은 1990년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 시조단을 마련했습니다. 이곳에는 충무공 조영무의 사당인 휴암묘(休巖廟)와 숭모사가 함께 있고, 양주시 향토유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조영무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습니다. 조광조를 모신 용인 심곡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남은 서원이며, 그의 묘소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습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전라남도 화순 능주에는 1667년 세운 적려유허비가 있습니다.

종친회

한양조씨대종회가 문중 전체의 일을 맡고 있으며, 대종회는 2007년 시조 조지수의 영정을 확정해 충청남도 홍성에서 봉안식을 열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양절공파·양경공파·충정공파·충무공파 등 파별 종회가 시제와 족보 일을 꾸려 갑니다. 일부 종중 자료는 한양 조씨를 충무공파·검한성공파·충정공파·양절공파·양경공파·가천재공파의 여섯 공파로 설명하고, 위키백과 등은 7세를 기준으로 한풍군파·도제공파·참판공파·고사공파·총제공파·돈녕공파·공안공파·병참공파 등 19개 파를 듭니다. 파의 구분과 세대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자세한 계보는 각 파의 족보와 종회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요 파(派)

양절공파, 고사공파, 병참공파, 한풍군파, 도제공파, 참판공파, 총제공파, 양경공파, 충정공파, 충무공파

양절공파 (良節公派)

양절공파(良節公派)는 시조 조지수로부터 6세인 양절공 조온(趙溫, 1347~1417)을 파조로 하는 큰 갈래로, 파 이름은 그의 시호 ‘양절(良節)’에서 나왔습니다. 조온은 용원부원군 조인벽의 맏아들로, 위화도 회군에 참여해 회군공신이 되었고 조선 개국공신 2등, 1398년 정사공신 2등, 1401년 좌명공신 4등에 올라 의정부 찬성사와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이르렀습니다. 계모 정화공주가 태조의 누이였기에 어려서부터 이성계를 외숙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하위 파 — 조온의 아들은 첨지중추부사 조의(趙儀), 한풍군 조완(趙琓), 조하(趙河), 선공감정 조흥(趙興), 의영고사 조육(趙育)으로 기록됩니다. 이 가운데 조완·조하·조흥·조육의 후손이 7세 기준 분파인 한풍군파·도제공파·참판공파·고사공파를 이룹니다.

인물과 세거지 — 고사공파에서 청백리 조원기와 그의 조카 정암 조광조가 나왔습니다. 조광조는 조온의 4대손입니다. 경기도 용인에는 조광조의 묘소와 그를 모신 심곡서원이 있어 이 파의 대표적인 터전으로 꼽힙니다.

※ 세대와 하위 파계는 문헌과 종중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유하신 족보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고사공파 (庫使公派)

고사공파는 7세 조육(趙育)을 파조로 합니다. 조육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한천부원군에 봉해진 양절공 조온의 아들로, 의영고(義盈庫)의 사(使)를 지냈기에 ‘고사공’이라 부르며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습니다.

조육의 아들 조충손(趙衷孫)은 1442년(세종 24) 친시문과에 급제해 평안도도사·병조정랑을 지냈습니다. 그는 안평대군과 가까웠던 탓에 1453년 극변에 안치되었다가 1468년에 풀려났고, 성종 때 성균관 사예를 지냈습니다. 가계 기록을 중히 여겨 작은 보첩을 만들고 여러 번 고쳐 썼다고 하는데, 이것이 한양 조씨 족보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 문절공 조원기(趙元紀)는 대사헌과 좌참찬을 지낸 청백리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 1524년 한양 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보를 엮었습니다. 조충손의 다른 손자인 정암 조광조(趙光祖)는 조원기의 조카로, 중종 때 도학 정치를 추진한 사림의 영수입니다. 이처럼 고사공파는 한양 조씨의 학문과 족보 전통을 일군 파로 평가됩니다.

병참공파 (兵參公派)

병참공파는 7세 조련(趙憐)을 파조로 합니다. 경상도 영주·봉화 일대에 근거를 두었으며, 12세 조극이 공주(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로 옮겨 가 세종 지역 한양 조씨의 입향조가 되었습니다.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세거한 이른바 주실 조씨도 이 파에 속하며, 별도의 항렬을 써 왔습니다. 지역 자료에 따르면 기묘사화 뒤 한양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조운종(趙云從)의 증손 조원(趙源, 1511~?)이 영양 원당(지금의 상원리)에 사는 함양 오씨 오필의 딸과 혼인해 정착했고, 그의 손자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1629~1630년 무렵 주실에 터를 잡았습니다.

주실에는 호은종택(경상북도 기념물), 호은의 증손 옥천 조덕린의 옥천종택, 1773년 세운 월록서당이 남아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청록파 시인 조지훈(본명 조동탁), 국문학자 조동일, 역사학자 조동걸, 제헌·2대 국회의원 조헌영이 나왔습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에 참여하고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거부한 마을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주실 조씨는 22세 병(秉), 27세 동(東) 등 대동항렬과 다른 항렬을 씁니다.

한풍군파 (漢豊君派)

한풍군파는 7세 조완(趙琓)을 파조로 하는 파입니다. 한양 조씨는 7세를 기준으로 19개 남짓한 파로 나뉘는데, 한풍군파는 그 첫머리에 꼽히는 파입니다.

조완은 조선 개국공신 양절공 조온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며, 정2품 품계인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내고 한풍군(漢豊君)에 봉해졌습니다. 파 이름은 이 봉호에서 나왔습니다. 조온의 아들 가운데 조완·조하·조흥·조육이 각각 한풍군파·도제공파·참판공파·고사공파의 파조가 되었으므로, 한풍군파는 큰 갈래로 보면 양절공파에 속합니다.

조완의 할아버지 조인벽은 태조의 누이 정화공주와 혼인했고, 아버지 조온은 개국·정사·좌명의 세 공신에 모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런 집안 배경 속에서 조완은 군(君)에 봉해질 만큼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파조의 생몰년과 후대의 세거지는 공개된 사전류에서 확인되지 않으므로, 자세한 계보는 한풍군파 족보와 종회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도제공파 (都制公派)

도제공파는 7세 조하(趙河)를 파조로 하는 파로, 한양 조씨 7세 기준 분파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하는 조선 개국공신 양절공 조온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며, 족보 기록에 ‘도제별장(都制別將)’을 지낸 것으로 나오며, 파 이름 ‘도제공파’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형 조완은 한풍군파, 아우 조흥과 조육은 각각 참판공파와 고사공파의 파조이므로, 도제공파는 이들과 함께 큰 갈래로 양절공파에 속합니다.

파조의 아버지 조온은 위화도 회군과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두 차례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의정부 찬성사에 오른 인물이며, 할아버지 조인벽은 태조의 매부로 용원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도제공파 후손들은 이 공신 가문의 맥을 잇는 일원으로서 양절공 조온의 제향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파조 조하의 생몰년과 관력, 후손의 세거지는 공개된 사전류에서 자세히 확인되지 않으므로, 계보와 세거지는 도제공파 족보와 종회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참판공파 (參判公派)

참판공파는 7세 조흥(趙興)을 파조로 하는 파로, 한양 조씨 7세 기준 분파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흥은 조선 개국공신 양절공 조온의 넷째 아들로 기록됩니다. 궁궐과 관청의 건축·수리를 맡던 선공감(繕工監)의 정(正)을 지냈고,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기에 ‘참판공’으로 불립니다. 아우 조육(고사공파 파조)도 같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습니다.

참판공파는 형제들이 세운 한풍군파·도제공파·고사공파와 함께 큰 갈래로 양절공파에 속합니다. 조온의 후손 가운데 고사공파에서는 청백리 조원기와 정암 조광조가 나와 이름을 떨쳤는데, 참판공파는 이들과 같은 할아버지를 둔 가까운 집안입니다. 한양 조씨 7세 기준 19파 목록에서는 한풍군파·도제공파에 이어 세 번째로 꼽힙니다. 파조의 생몰년과 후손의 세거지는 공개된 사전류에서 자세히 확인되지 않으므로, 계보는 참판공파 족보와 종회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총제공파 (摠制公派)

총제공파는 7세 조모(趙慕)를 파조로 하는 파로, 한양 조씨 7세 기준 분파 가운데 하나입니다. 위키백과의 7세 기준 분파 목록과 2013년 세계일보 연재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의 분파 목록에 모두 고사공파와 돈녕공파 사이에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파 이름의 ‘총제(摠制)’는 조선 초기 군사 기구인 삼군도총제부에 둔 고위 무관직으로, 각 군에 도총제·총제·동지총제·첨총제를 두었습니다. 파조가 이 벼슬을 지냈기에 ‘총제공’으로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 7세는 대체로 조선 태종~세종 무렵에 활동한 세대로, 조인벽·조인옥 형제의 아들들인 조온·조연 등이 공신과 재상으로 현달한 바로 다음 세대에 해당합니다. 이 무렵 공신 가문의 자제들이 무관직에 많이 나아갔던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파조 조모가 어느 6세 조상의 아들인지, 그 생몰년과 후손의 세거지는 공개된 사전류에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계보와 세거지는 총제공파 족보와 한양조씨대종회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양경공파 (良敬公派)

양경공파는 조선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양경공 조연(趙涓, 1374~1429)을 파조로 하는 갈래로, 파 이름은 그의 시호 ‘양경(良敬)’에서 나왔습니다. 조연은 용원부원군 조인벽과 태조의 누이 정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이복형 조온(양절공파 파조)과 함께 한양 조씨 6세의 대표 인물로 꼽힙니다.

조연은 1386년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 뒤 왕의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별운검이 되어 태조를 호위했습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4등에 오르고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습니다. 1410년 길주도 도안무찰리사로 나가 변경을 침범한 야인을 쳐서 공을 세웠고, 공조판서·찬성사를 거쳐 한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426년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문신이면서 야인 정벌에서 무공을 떨쳤다는 평을 받습니다.

양경공파는 오늘날 한양 조씨의 주요 공파 가운데 하나로 종회가 따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2년 양주 시조단 답사 기록에도 양경공파 종중 회장이 함께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위 파계와 세거지는 양경공파 족보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충정공파 (忠靖公派)

충정공파는 조선 개국공신 1등 충정공 조인옥(趙仁沃, 1347~1396)을 파조로 하는 갈래로, 파 이름은 그의 시호 ‘충정(忠靖)’에서 나왔습니다. 조인옥은 용성군 조돈의 넷째 아들이자 조인벽의 아우로, 위화도 회군을 건의하고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으며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족보 기록에 따르면 조인옥에게는 지돈녕부사를 지낸 절효공 조뢰(趙賚), 조재, 검교공조판서 조관(趙貫), 지예원군사 조갱(趙賡)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자 조순생(趙順生)은 1453년 계유정난 때 아들·손자와 함께 큰 화를 입었다고 전합니다. 7세 기준 분파 목록에서 파서공파(坡西公派)의 파조도 ‘순생(順生)’으로 올라 있습니다.

근대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유석 조병옥은 조인옥을 직계 선조로 두고 있어 이 파의 대표적인 근현대 인물로 꼽히며, 그의 아들 조윤형·조순형도 같은 계통입니다. 충정공파는 일부 종중 자료에서 한양 조씨 6대 공파의 하나로 소개됩니다.

충무공파 (忠武公派)

충무공파는 조선 개국공신이자 우정승을 지낸 충무공 조영무(趙英茂, ?~1414)를 중심으로 하는 갈래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영무를 시조 조지수의 고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순후(趙珣厚), 아버지는 조세진(趙世珍)으로 적고, 같은 집안의 조인옥·조온이 출세한 데 힘입어 한양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문중 쪽에서는 조지수의 아들 조인재(趙麟才)에서 이어지는 계통이라고 전합니다.

계보에 대한 이견 — 조휘 직계 후손들은 조휘를 조지수의 외아들로 보고, 조영무 계열은 자신들의 선조가 조지수의 장남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로 족보를 만들어 오다 조선 후기에 합보 문제가 일면서 지금까지 이견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시련과 유적 — 1453년 계유정난 때 조영무의 장손 지평 조완규(趙完珪)가 이듬해 사사되고, 그 아우와 사촌들이 유배되는 등 한 집안 여섯 명이 화를 입었습니다. 이 일 이후 충무공파 일부가 경기도 양주에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는 조영무의 사당 휴암묘(休巖廟)와 숭모사, 1990년 조성한 시조단이 있어 시조와 2~4세, 충무공의 제향을 올리고, 조영무의 묘소는 광주시 퇴촌면에 있습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대표 인물

조광조(조선 중종대 사림의 영수), 조온(조선 개국공신), 조인옥(조선 개국공신), 조인벽(용원부원군), 조영무(우정승·개국공신), 조연(세종대 우의정), 조원기(청백리·족보 편찬), 조수삼(여항시인), 조지훈(청록파 시인), 조병화(시인), 조병옥(독립운동가·정치인)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한양 조씨 가계도, 이렇게 만드세요

  1. 나부터 등록 — 로그인하면 나만의 트리가 생깁니다. 본인 이름·생년·본관(한양)을 입력합니다.
  2. 윗대 올리기 — 부모·조부모를 추가합니다. 정확한 확인은 제적등본으로 조상 찾기를 참고하세요(보통 5대까지).
  3. 형제·자녀 연결 — 항렬(돌림자) 순으로 정렬하면 세대가 한눈에 정리됩니다.
  4. PDF·공유 — 완성한 가계도를 PDF로 저장하고 가족을 초대해 함께 관리합니다.
한양 조씨 족보·계보도를 온라인으로. 종이에 그리다 지우지 말고, 무료로 시작해 계보를 세대별로 자동 정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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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조씨 종친회

한양 조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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